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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줄

 

 

                                                                                       이재진

산과 들이 고운 옷으로 갈아입는 화사한 가을이다. 숨어사는 들꽃의 겨울나기 모습을 찾아 길 없는 길을 간다. 꽃 진 자리에 오순도순 옹기종기 익어가는 열매는 화려한 옛 추억을 어찌 품고 지낼까. 한여름을 사랑하던 곤충들은 겨울나기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추억을 만들고 지나간 편한 길을 버리고 다람쥐가 만든 오솔길을 지나 새길 위에 새 인연을 만들며 간다. 이 많은 날들을 살아오면서 아직도 찾고 싶은 무엇이 그리도 많아 길 없는 길을 어슬렁거리며 헤매고 있나.

엷은 물결에도 까닥거리는 작은 배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잡목 숲을 지난다. 잡목 숲엔 역광에 더욱 아름다운 북나무가 산다. 어릴 적부터 해지는 저녁이 좋아 붉은 노을과 손잡고 놀아서 그런지 노을처럼 곱게 물들어 있는 잎들이 내 눈을 잡는다. 숲속에 사는 바람은 숲을 떠나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살듯 모두 제 인연에 따라 제자리를 맴돌며 살아간다.

잔가지들이 팔을 벌리고 길을 막는다. 살짝 구부리고 살금살금 걷는다. 가끔은 모자를 벗겨 가는 나뭇가지들이 웃는다. 조금 넓은 데다 싶으면 얼굴에 친절하게 안기는 거미줄들이 반긴다. 이곳은 산 왕거미나 무당거미의 터전인가 보다. 끈끈한 줄을 곱게 늘여놓고 한 복판에 앉아 자기 영토를 감시한다. 쉬는 것이 아니라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거미가 살아가기 위해서 줄을 늘이듯 사람도 사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의 줄을 엮는다. 어부들은 그물이나 낚싯줄을 손질하고 동네마다 집집마다 전깃줄 전홧줄을 늘이고, 요즘 시대를 살아가려면 인터넷 줄을 끌어 들인다. 현악기를 다루는 이들은 악기의 줄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 연鳶을 날리는 이들은 그 줄을 따라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며 즐거워하겠지.

사람들은 나일론 줄보다 더 질긴 인연의 줄들을 수도 없이 늘여 놓고 산다. 필요에 따라서 별의 별 줄들을 찾아 쥐고 때로는 당기고 때로는 늦추며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 주변엔 보이지도 않는 많은 줄들이 얼기설기 얽혀서 우리를 끌고 다닌다. 그래서일까 줄은 아주 옛날부터 살아가는 길이며 희망의 방편이고 생명의 끈이 되기도 한다.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탯줄이나 몸 속 구석구석에 널리 퍼져있는 핏줄. 신경 줄들 모두 우리의 삶과 관계가 있다. 집에서 아기를 낳으면 문밖에 금줄을 걸고 동구 밖 당산나무에도 해마다 금줄을 걸어 놓는다. 이런 줄들은 신성한 자리에 부정한 것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 믿어 왔다. 사람이 죽으면 상여 뒤에 긴 줄을 늘이고 망자를 배웅하는 것도 산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끈이리라.

줄은 출세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줄 한번 잘못 잡으면 악의 구덩이에 빠져 고난을 겪기도 한다. 어느 줄에 서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이는 웃기도 하고 어떤 이는 울기도 하며, 어떤 이는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줄을 붙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흔히 혈연이니, 지연이니, 학연이니 해가며 튼튼한 내줄 찾기에 바쁘다. 그리고 살면서 아름아름 줄을 맺은 인맥을 찾는다. 정치인도, 사업가도, 심지어는 연구원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님들도 줄을 찾기는 마찬가지다. 취직을 하려해도 줄을 찾고, 결혼을 하려는 이도 줄을 찾는다. 이들이 혹시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처럼 되지는 않을까.

우리의 민속신화에서 해와 달이 된 남매이야기다. 동아 밧줄에 의해 남매는 하늘로 올라가고 호랑이는 썩은 밧줄 탓에 떨어져 죽지 않는가.

나도 살아오는 동안 여기저기 얽힌 인연의 줄들이 꽤나 있으련만, 언제부터인가 카메라 하나 달랑 둘러메고 산으로 들로 떠돌기 시작했다. 사진과의 인연의 줄이다. 이 새로이 만난 소중한 끈이 나를 끌고 다닌다. 아마도 사주팔자에 역마살이라도 끼었던가. 나다니는 게 즐거워서 방랑의 시간을 더듬고 사나보다. 애초부터 멋지고 든든한 줄을 잡고 살았으면 어찌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이 인연들은 나를 얼마나 소중한 시간 속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

시골 넓은 마당 바지랑대에 받쳐진 채 몇 년씩 안 쓰고 버려둔 굵은 빨랫줄도 삭으면 못쓰듯 오랫동안 못 만난 인연들 하나하나 다 멀어져 가고 외톨이처럼, 달팽이처럼 움츠리고 살아 온건 아닐까. 아님 그 끈들을 그냥 두고 새로운 또 다른 줄이 필요했던 건 아닌지.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인연의 줄로 해서 하루가 즐겁고 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기에 바쁘고 내가 만든 자연과의 교감인 사진을 보면서 행복해 한다.

햇볕 조는 곳에 연분홍 진달래 꽃 두어 송이가 애처롭다. 아무리 기후변화 탓이라지만 모두 겨울준비에 바쁜데 지금 꽃이 피다니. 저 꽃도 이리 늦은 날에 어떤 인연의 줄을 찾아 새 세상 구경을 나온 것일까.

 

 

1938년 황해도 금천 출생.

한국 사진작가협회 회원. 광진예총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