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

 

새로운 발견으로서의 글쓰기

 

                                                                                         이태동

어느덧 신록의 계절이 찾아왔다. 얼마 후 오월이 찾아오면 뒷산에 하얗게 핀 아카시아 꽃향기가 묘지처럼 조용한 골목길 아래로 뿌릴 것이다. 그리고   ‘유월이 오면 건초더미 속에서 풀냄새를 맡으며 애인과 함께 노래 부르리!’라고 노래한 어느 영국 시인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곧 가을이 찾아와 여름의 잔재를 무덤으로 쓸어갈 것이다. 이것은 물론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 때문이리라. 발트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역사의 천사는 우리들 눈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일어나게 해서, 스스로 그 잔해殘骸의 파편이 쌓아올려지고, 내던져지는 대재난을 본다. 그리고 그 천사는 거기에 계속 머무르며 죽은 자를 일깨우고 산산이 조각난 것을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폭풍우가 낙원에서 불어와 그 천사 앞에 파편더미를 하늘로 향해 쌓아올리며 그가 등지고 있는 미래로 그를 마구 몰아낸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우이다.’

시간의 변화는 인간이 희구하는 잃어버린 낙원을 성취하기 위한 역사적인 힘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윌리엄 블레이크는 “뼈가 묻힌 무덤일지라도 달구지는 몰아야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지난해 김태길 선생님을 잃고, 연륜이 쌓였던 방배동 시대를 마감하고, 지금 서초동으로 옮겨와서 다시금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야 있게 마련이지만, 시대가 바꿨으면 변화를 이룩해야만 하는 것이 역사의 의무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변화는 단순한 장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수필 쓰기의 변혁과 탈바꿈을 의미한다. 서정성이 짙은 생활 수필을 쓰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더 이상 진부한 일상적인 ‘신변담론’ 수준의 글쓰기에서는 벗어나야만 한다. 서정성이 짙은 글은 독자의 정서적인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지성과 융합되지 않으면 감상적인 늪에 빠진 클리쉐가 되기 쉽다. 수필이 취급하는 소재가 모든 사람이 느끼지만 말하지 못한 숨은 진실을 탐색해서 그것을 지적 울림으로 나타내지 못하면 훌륭한 작품으로 기억될 수 없다.

그래서 생활 수필을 쓰지만 철학적인 문제나 삶의 지혜를 지적 언어인 잠언箴言 형식으로 표현해 보는 것도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한 번 개척해 볼 만한 영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또 형식적 수필도 탁월한 소재와 지적인 언어로 미학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글이 되면, 다른 문학 장르에 대해 비교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발견의 테크닉’이다. 아무리 서정성이 뛰어난 수필이라도 그것이 새로운 것을 발견한 부분을 갖지 못하면 지리멸렬한 일상성에 함몰되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이번 호에 우리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세계의 명산문으로 싣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서초동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계간 수필》이 그 동안 이어온 전통을 지키면서 일급 문예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변해야만 한다. 이것은 시대적인 요구인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란 점을 다시금 강조 하고 싶다. 회원 여러분의 깊은 자기성찰과 협조가 있기를 기대한다.

 

(본지 편집위원 ·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