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김형진

허위허위 비탈을 오른다. 산길은 울퉁불퉁하다가 평평해지고, 활처럼 휘다가 예각으로 꺾인다. 잡목 숲 사이를 비집고 든 햇살이 어른어른 시야를 어지럽힌다. 숲 속에서 상수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참나무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청설모가 바쁘다.

웬일일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공원이라 아침저녁으로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상하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한낮이다. 한가위에 가족들이 모이고,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러 선산에 다녀오느라 사흘 동안이나 공원에 오르지 못해 오늘은 한낮 따가운 햇볕을 무릅쓰고 오르는 참이다.

바로 코앞인데도 봄가을에만, 그것도 생각나면 어쩌다 오르던 공원이었는데 추석을 며칠 앞두고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르게 되었다. 그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을 살짝 피해 한적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꽃.

그 꽃을 보기 위해 따가운 햇볕도 팍팍한 다리도 거친 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탈을 오른다. 꺾어든 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좁은 길에 쌓인 낙엽이 제법 푹신하다. 길 따라 빤히 보이는 하늘이 높푸르다. 붉은 꽃잎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걸음을 재촉한다. 측백나무 숲을 도니 고개를 들고 보아야할 만큼 많은 계단이 이어진 길이 나타난다. 흡사 긴 사다리를 걸쳐 놓은 듯하다. 길 오른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은 말뚝에 매어놓은 밧줄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추석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그날도 이 근년에 와서 명절이면 도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세가 또 나타났다. 가슴에 차 있던 것들이 다 빠져나가 나중에는 가슴도 머리도 다리도 다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황증세에 빠져 한나절을 시달리다가 생각해낸 것이 공원이었다.

사다리 같은 계단을 다 올라 목구멍에 차오는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길가에 서 있는 노송 줄기에 등을 기댔다. 거친 숨이 가라앉자 땅 위에 등을 내민 노송 뿌리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쪽으론 눈에 익는 상수리나무, 삼나무, 측백나무가 보이고, 이쪽엔 맹감덩굴에 휘감긴 사철나무와 붉게 물든 개옻나무가 보였다. 그런데 개옻나무 줄기 너머로 작은 꽃 몇 송이가 보였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호기심에 다가가 보았다. 방석만한 빈터에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숨죽이고 있는 작은 꽃. 줄기며, 가지며, 잎이며, 꽃을 찬찬히 살폈다. 키는 작으나 단단해 보이는 자주색 줄기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벋은 가지에 타원형 잎이 정연하고 그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피어 있는 작은 꽃이 조촐했다. 꽃잎은 다섯인데 가장자리의 연분홍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붉어져 가운데에선 선홍빛 원을 그렸다. 가을을 대표하는 국화나 코스모스와는 느낌이 달랐다. 국화와 코스모스가 자기의 속내를 죄다 내보이는 꽃이라면 이 꽃은 한 번도 내보이지 않은 열정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밧줄에 의지하여 오르는데도 숨이 차다. 계단을 다 오르니 숨이 목구멍에 걸린다. 거친 숨결을 토하면서도 눈길은 그 노송을 찾는다. 잠시 숨을 돌리고 노송에 눈길을 빼앗기며 걷다가 길바닥에 등을 내민 나무뿌리를 잘못 디뎌 몸이 기우뚱한다. 기우뚱한 몸을 바로 세우고 걸음을 재촉한다.

노송을 지나쳐 꽃이 있던 자리로 바로 간다. 빈터에는 가을 한낮의 햇빛이 가득하다. 꽃나무는 그 밝음에 부대끼며 숨을 죽이고 있다. 오므라들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의연한 자세다. 그런데 이상하다. 줄기며, 가지며, 잎은 아직도 싱싱해 보이는데 꽃 색깔이 이상하다. 꽃잎 자장자리의 연분홍은 희부옇게 변했고 가운데 선홍빛 원은 옅은 보라색을 띠고 있다. 한참 동안 붙박이로 서서 꽃을 내려다본다. 가슴속에서 한 줄기 바람이 인다.

눈을 든다. 멀리 상수리나무가 눈길에 잡힌다. 누렇게 변한 잎들에 뒤덮여 있다. 가까이 있는 옻나무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인 양 빨간 단풍이다. 하늘을 본다. 새털구름 한 무리가 시름없이 흘러간다. 다시 꽃을 본다. 며칠 뒤엔 저 꽃마저 시들어 떨어지고, 나중엔 저 잎이며, 가지도 말라버리겠지.

다시 하늘을 본다. 한참 동안이나 선홍빛 꽃송이가 새털구름을 따라 흘러가는 듯한 환상에 빠져 멍하니 서 있다. 가슴속에서 일던 바람마저 술술 빠져나감을 느낀다.

가을꽃과 작별하고 돌아서는 다리가 잠시 휘청한다.

 

 

《계간수필》로 등단(97년), 수필평론가, [토방] 동인.

수필집  《흐르는 길》,  《종달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