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엿보기

 

 

                                                                                   오순자

오종종하게 털로 쌓인 타원형의 강아지풀 대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공간을 흔들어 내 다리까지 전달된다. 꼼짝 않고 다리에 붙어있던 늦더위의 기세도 흔들린다. 옆에 나뭇가지의 검푸른 작은 잎들이 살짝 몸을 비튼다. 그 위로 키 큰 나무에 매달려 낮잠을 자던 널찍한 목련 잎들이 건들거리며 깨어난다. 강아지풀이 조금씩 더 세게 흔들리다가 강하고 빠르게 움직인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검은 구름이 햇빛을 가리며 하늘에 느릿느릿 장막을 친다.  오래지 않아 해는 완전히 가려지고, 뒷산의 대나무들이 잎을 비비며‘쏴아∼,쏴아∼’파도 소리를 낸다. 몇 개의 이파리들은 공중을 휘돌아 멀리 날아가 버린다. 백 살이 넘은 가죽나무도 조금씩 팔다리를 흔든다. 그 머릿속에 들어있는 까치집이 걱정이다. 산까치들은 슬금슬금 뒷산의 대나무 숲으로 숨고 있다. 멀대같이 키만 큰 대나무 숲에서 비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그들은 그곳에서 잠을 자고 비를 피한다.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여 집 안으로 들어온다. 유리창으로 달려드는 물방울들의 조금씩 거세지는 기세에 불안해진다. 유리도 부들거리며 가늘게 운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며,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한참을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무료해져서 모네의 화집을 펼쳐든다.

모네는 중년에 마음이 잠시 흔들렸는지, 움직이는 물체들의 한순간을 포착한 그림을 그렸다. 그 동적인 이미지 속에서 관람객들은 상상력을 통해 그 사물의 이동 단계를 영상화시킬 수 있다. 그림 속에 관람객의 몫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거의 땅에 닿을 것처럼 휘어져 누워 있는 붓꽃과 누군가에게 희롱을 당하는 듯 흔들리는 원추리 꽃은 괜히 안쓰럽다. <우산을 든 여인의 왼쪽 모습>에서는 여인의 목 앞으로 쏠려 있는 푸른 스카프의 공중 부유, 휘어진 우산의 곡선과 여인의 치맛자락이 앞으로 심하게 쏠려 있다. 아마 잠시 후면 스카프가 목에서 풀려나가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 우산 역시 땅 위에 나뒹굴 것 같다. 치마는 어쩌면 여인의 얼굴 위로 치솟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쏠림을 이겨내려고 애쓰는데, 무사히 평온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창밖의 풍경이 모네의 그림처럼 한쪽으로 누워 있고, 일어서려는 나무들의 노력이 필사적이다. 그 노력을 포기하면 뿌리가 뽑히거나, 가지가 떨어져나갈 것이다. 그 나무 사이로 모네의 우산을 든 여인처럼 심한 쏠림을 이겨내려고 온 힘을 다했던 한 여인의 영상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안타까운 목격자였다.

그녀는 내 옆자리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그녀의 책상 옆에 서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책을 보던 그녀가 눈을 들어 그를 보고 웃었다. 장난 끼 많은 그의 얼굴은 봄 햇살을 되쏘는 반사경처럼 그녀의 마음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마음속은 금세 충만감으로 빈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 밑에 숨어서 그녀를 옥죄는 그림자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만남은 거기까지다. 다른 인연에 묶여 있으므로 미래를 이어가서는 안 된다.’

그녀는 이유 모를 끌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억제할 수 없는 힘이 그를 향해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끌림에 대해 서로에게 아무런 표현을 한 적은 없었지만 마음의 통로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가 고삐를 놓으면 두 사람은 함께 미래를 향해 걸어갈 것이었다.

같은 일터에서 휴식 시간에 차를 마시며 잠시 대화를 나누고, 퇴근길에 만나면 화랑에 들러 그림을 보거나,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졌지만 강렬한 감정은 사람들의 눈을 붙들었는지 약간의 수군거림이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있어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가족들을 위해서, 또 그의 앞날을 위해 그 일터를 떠났다.

그녀는 아낌없이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지만 엇갈린 시간에 만난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 후에 그도 다른 일자리로 옮겼고, 결혼 소식이 들렸다. 한동안 그녀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모네의 붓꽃처럼 시달렸지만, 오래지 않아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감정에 영원이란 없고, 잠시 지속되다가 그 흔적만 남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끔 떠오르는 흐릿한 그의 기억으로도 아름답게 채색된 한 장의 그림처럼 마음에 다사로운 햇볕이 드는 듯하다. 그녀는 짧았지만 분명 행운이 찾아왔었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날이 개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햇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뒤 언덕의 대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울타리에 기대어 있다. 그것은 그렇게 뿌리가 들린 체, 불안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한바탕 춤을 추고 난 앞뜰의 가죽나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지금은 평온 속에 휴식을 누리고 있으나 따분해지면 다시 흔들리고 싶어질 것이다.

 

 

《뉴욕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계간수필》,  《에세이문학》 추천완료.

한일장신대 영문과 교수 역임, [토방] 동인.

저서  《생활 속의 글쓰기》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