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

 

 

                                                                                       이경수

동네는 한적했다. 집들은 단층에 허옇게 바랜 기와지붕의 묵은 집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이사 온 집도 그랬다.

이사하고 6개월 만인 봄에 집을 헐고 새로 짓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문을 줄여라, 계단을 다른 쪽으로 만들어라, 하면서 길 건너 집들과 옆집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동네 반장 일을 보는 세탁소 주인은 이웃들이 텃세를 부리는 것이라 했다.

집을 다 짓고 입주를 했지만 앞으로 이웃들과 마주치며 살 것이 걱정이었다. 집 짓는 동안 그들로부터 받은 고통이 너무 컸다. 몸은 축이 나고 노한 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먼발치서 오는 그들만 보아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벌렁거리던 가슴은 가라앉았지만 그때의 기억이 흉터처럼 남아 있다. 이미 세상을 등진 이도 있고, 이사를 했거나 집을 헐고 다시 짓거나 하기도 했다. 기억이 되살아난다 해도 빈 배처럼 된 이웃에게 무슨 감정이 있으랴. 다만 담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옆집만 사람도 집도 그때 그대로다.   

바로 옆집이라 믿었던 아저씨. 지금은 노인이지만 20여 년 전엔 서슬이 퍼래가지고 다른 이웃을 부추겨 우리를 더 힘들게 했다. 요즘도 우리 멍멍이가 짖으면 시끄럽다며, 도둑도 못 지키는 개를 왜 키우는지 모르겠다고 큰소리로 혼잣말처럼 투덜댄다. 또 자기네 화분에 나무그늘이 진다는 둥, 이파리가 떨어져 귀찮다는 둥 하면서 나뭇가지를 잘라내라고, 순하게 해도 될 말을 볼멘소리로 한다. 언젠가는 자기 집 쪽으로 뻗은 목련가지를 꺾어서 수북이 던져 놓기도 했다.

아주머니도 살갑지 않기는 마찬가지라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웃 사이에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지내고 있다. 우리에게 트집잡는 아저씨 편을 들만도 한데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사를 하면 되레 미안쩍은 듯 얼른 받고 지나간다.

몇 년 전 가을이다. 아주머니에게, 모과 딴 것을 주며 “차 만들어서 드세요.” 했더니 모과차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한마디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좀 더 친해져 보려고 한 짓인데 오히려 버름해지고 말았다. 단감도 꽤 열어 몇 집 나누어 줄만했다. 모과차는 안 좋아 해도 감을 싫어하지는 않겠지 하며, 작은 바구니에 담아서 ‘저희 집에서 딴 감이니 맛있게 드세요.’라고 쪽지편지를 넣어 담 위에 올려놓았다. 그날 옆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뒤 아주머니가 뜰에 있는 나를 불렀다. “감이 참 달데요.” 하며 미역 한 묶음을 주는 것이었다.

아저씨하고는 거의 외면하다시피 지냈다. 길에서 만나도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모른 척 지나쳤다. 요즘 들어 이웃 사이에 너무 정 없이 군 것 같아 먼저 인사를 하거나 말을 붙여본다. 그러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얼른 고개만 끄덕인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시장에서 함께 가게를 했다. 아들만 셋인데 진작에 다 분가시켜서 낮 동안엔 늘 집이 비어 있었다. 요즘은 가게를 정리하고 화초며 채소를 가꾸면서 심심치 않게 사는 모습이다. 넓은 뜰도 아닌데 흙을 퍼다 밭을 만들고 화분마다 꽃을 심어 그것들 손질하느라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그날도 이야깃소리가 났다. 슬쩍 담 너머로 넘겨다보았다. 약간 언덕이 진 땅에 우리 집이 높은 쪽이라 까치발을 하면 옆집 앞마당이 다 보인다. 전에 못 보던 꽃이 이 화분 저 화분에서 하늘댔다. 아저씨는 그새 안으로 들어갔는지 아주머니 혼자였다.

“어머, 저 꽃이 있네요.  이름이 뭐지요?”

“글씨, 얻어다 심은 것인디, 나도 모르겠구먼.”  

“내가 좋아하는 꽃인데 이름을 몰라서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거리다 그냥 들어왔다.

어느 날이다. 빨래를 널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봐요. 이봐요.”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담 너머에서 아저씨가 오라는 손짓을 하며 날 부르는 거였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그러나 덜컥 겁이 났다.

“이거 저 꽃 꽃씬데 내년에 심어보슈.”

꼭꼭 접은 하얀 종이봉투를 건네는 것이었다. 봉투에는 ‘족두리 꽃’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아주머니에게 무슨 꽃이냐고 물었던 그 꽃 씨앗이다. 그날 아저씨는 소년처럼 수줍은 표정이었다. 나 또한 얼었던 몸이 풀리는 듯 오싹하니 떨렸다.

내년 여름에는 옆집 꽃밭에도 우리 집 꽃밭에도 족두리 꽃이 하늘 댈 것이다.

 

 

2002년 《계간수필》로 천료, [토방]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