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다시 읽는 글 ⑮ |이응백 편|

 

본회의 원로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와 전 한국수필문학진흥회장으로 우리나라 수필문학발전에 기여가 많았던 난대 이응백 선생께서 지난 3월 29일, 숙증으로 성모병원에서 88세의 일기로 영면하셨다. 그분의 대표작을 다시 읽으며 그분을 추모하는 글 세 편을 묶어 특집을 꾸민다. 삼가 명복을 빈다.

                                                                                    (편집자)

 

 

 

언덕 위의 하얀 집

 

 

우리가 이 곳 세검정洗劍亭 동네로 이사 온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이사 오던 해 여름, 저녁이 되면 반딧불이 뜰에서 번쩍이며 날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전원적田園的이어서 시골 태생인 내 머릿속 깊숙한 곳에 잠잠히 깃들어 있었던 어릴 적 향수鄕愁가 오랜만에 꽃피었던 기쁨은 지금껏 잊히질 않는다. 변화의 속도가 몹시 빠른 요새는 10년이란 대단히 긴 기간이었던 듯 그동안에 북악北岳 터널이 뚫리고, 승가사僧伽寺 골짜기서 흘러내려오는 개천도 복개가 되었으며, 그 위를 거쳐 불광동으로 통하는 구기舊基 터널도 뚫렸다.

복개되기 전 개천가에는 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 내려오던 닥나무로 종이를 뜨는 공장이 있었다. 해방 전은 물론 해방 후에도 그 공장은 계속 가동되고 있었다. 우리가 이리로 이사 온 뒤 얼마 동안만 해도, 설령 전처럼 직접 종이는 뜨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장판지를 겯는 가공은 계속되고 있었다. 포도밭 시렁처럼 얼기설기 늘어 세운 나무시렁에 장판지를 하나 그뜩 국수발처럼 걸어 말렸다. 개천 건너 동쪽 산기슭 민틋한 잔디 펀더기에 두부모처럼 가로세로 귀를 맞춰 죽 널어놓은 장판지가 바람이 일면 낙엽처럼 들썩이고, 바람이 더 세게 불면 한쪽 귀가 들썩, 전병煎餠 과자처럼 도르르 말리다가 회오리바람이라도 만나면 모닥불길처럼 한꺼번에 원추형圓錐形을 이루면서 하늘로 빨려 올라간다. 그러다가 음력 정월 대보름날 줄 끊긴 액厄막이 연처럼 이리 너풀 저리 너풀 하면서 아무데나 떨어진다. 이런 어수선이 스쳐 가면 주인은 비바람 뒤에 아람 줍듯, 이리 닫고 저리 뛰면서 멋대로 흐트러진 종이를 주워 모으느라 정신이 없다. 이러한 한바탕의 활극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지난 일로 돼 버렸다.

승가사로 오르는 어귀까지의 오솔길이 탄탄대로로 바뀌고, 구기 터널이 뚫리더니 큼직한 건물들이 자꾸 들어서 동네의 모습이 일신하고 교통도 훨씬 편리해졌다.

그러나 편리는 왕왕 반대급부反對給付를 가져오는 법, 그렇게 맑던 공기가 그전만은 못하게 되었다. 그야 지금도 자하문紫霞門 안쪽보다는 훨씬 깨끗하긴 하다. 문안에서 안 뵈던 별이 자하문 고개만 넘어서면 보이게 되니 말이다.

더구나 내가 사는 집은 복개 차도에서 꽤 떨어져 있는데다가 큰길가에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 차들의 소음이며 배기 가스를 막아주고, 담벽에서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연방 산소를 뿜어 주니 아주 시골만은 못해도 종로구로서는 가위 일등지라 하겠다.

내 집은 평지보다는 조금 높은 경사지에 지은 2층집이라, 위층에서 내다보면 사방이 탁 트여 한여름에도 선풍기가 별로 필요치 않다.

어디를 보나 산들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고 현신現身한다. 봄의 진달래며 초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이며 겨울의 눈경치가 폭폭이 동양화를 이룬다.

봄이 와서 저 멀리 북악北岳 뒤켠에 아지랑이가 아슴프레 가물거리면 동편 산비탈의 거무틱틱한 소나무 사이로 진달래가 수줍게 연분홍 단장을 하고, 이어 밤나무며 도토리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파릇파릇 새순을 돋힌다.

여름철 뒷문을 열어 놓고 식탁 앞에 앉으면 북쪽 산 위의 나무가 길게 자라 올라 사막의 원구圓丘와도 같이 부드럽게 그려진 능선이 보인다. 그 능선 너머에는 낙엽이 푹푹 쌓여 부엽토腐葉土의 무진장한 보고寶庫를 이루고 있다. 한 두어 번 배낭을 짊어지고 식구들과 함께 그것을 채취해다 분갈이를 한 일이 있다. 능선 마루터기에는 탐스럽게 자란 소나무에 둘러싸인 아늑한 자리가 있어 독서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능선 이쪽으로는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를 사철 샘물이 졸졸 흘러내린다. 그러나 간혹 지나는 산책객의 목을 축여 줄 뿐, 여느 곳처럼 무슨무슨 약수니 하여 버젓이 개발되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물줄기 따라 난 오솔길은 갈수록 풀에 묻혀 갈 지경이다. 근처의 이름난 약수터들 사이에 자리한 사각지대死角地帶라고나 할까?

그 오솔길을 걸을 때는 미처 못 보았었는데, 식탁에서 바라다보니 언덕 위에 하얀 집이 한 채 눈에 띈다. 붉은 지붕 밑에 널찍한 벽면壁面이 햇볕을 받아 유난히도 하얗다. 한 식경食頃을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무엇하는 집일까?

부산釜山 피난 시절, 나는 보수寶水 공원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직장 옆이라서 거기다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산비탈 판자 마을 복판쯤에 나이가 서른쯤은 되었을 남자가 홀로 사는 집이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는 기색도 없다. 가끔 밖으로 나와 하늘이며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다.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왜 혼자 살까? 혹 폐라도 나빠 공기가 맑은 이 삼杉나무 숲에서 요양이라도 하는 것일까? 저렇게 뒷바라지하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영양 관리를 해갈까? 이러한 의문이 꼬리를 이었지만, 끝내 풀리지는 않고 말았다.

보통 인가人家와는 상당히 떨어져 산중턱에 홀로 자리잡은 저 하얀 집에도 마찬가지 의문과 호기심이 일어난다. 단 6, 7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이지만 나는 애써 알아보려고도 안 했다. 모르는 채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이 있다. 남의 경치를 빌려 자기 집 것처럼 관상하는 것이다. 벌써 여러 해 전 어느 여름밤에 흑석동黑石洞으로 백철白鐵 선생 댁을 찾은 일이 있다. 응접실 유리창 너머 저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한강漢江의 야경夜景은 그야말로 홍콩의 그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스럽고 현란했다.

“선생님! 전망이 참 좋습니다.”

“그것이 다 우리 정원庭園이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인 송宋의 소식蘇軾은 그의 《적벽부赤壁賦》에서 강상江上의 청풍淸風과 산간山間의 명월明月은 다 자기 것으로 차지한다 해도 말릴 이가 없다고 했다.

내 집에도 아래위로 나뉜 정원이 없는바 아니지만, 그보다는 차경借景은 그 몇 배가 된다. 멀리 바라뵈는 산들의 경치는 차치且置하고, 가까운 둘레에서 그러하다.

2층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눈 아래로 정성들여 가꾸어진 긴 삼각형 정원의 잔디며 온갖 화초, 나무들, 그리고 그 왼쪽의 공들여 지은 서구풍西歐風의 붉은 기와로 이은 2층 양옥까지도 우리 아래층 정원의 테두리에 들어온다. 담과 담 사이의 길은 담에 가리어 보이지 않고, 담 자체도 윗면만 두 줄로 내려다보이므로 도무지 다른 두 개의 정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2층 응접실 남창南窓으로는 성루城樓같이 우뚝 솟은 거대한 양식洋式 집이 보인다. 동쪽 베란다에 죽 늘어놓은 화분의 꽃들도 그렇거니와, 담장 너머 이쪽으로 마치 구슬발처럼 피어 늘어지는 적황색의 능소화凌鱗花는 기품氣品 있고 싱싱함이 꽃 중의 으뜸이라.

그 이쪽 빈터에 봄에서 가을까지 부쳐지는 무 배추 밭은 수도 안에서 시골의 정취情趣를 만끽滿喫하게 해 준다.

사실 나도 이리로 이사 온 2, 3년 뒤 서쪽 빈터에 배추와 무를 심어 한창 자라는데, 땅 임자가 와 다 파헤치고 높직하게 집을 지었다. 원래 그쪽엔 통용문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다른 장애는 없으나, 우리 집이 전처럼 뚜렷이 떠올라 보이질 않게 되었다.

그런 몇 해 뒤, 이번에는 앞밭에 집이 들어섰다. 그 터를 사서 채마를 부칠까 생각도 했었는데, 느닷없이 문안에 사는 주인이 와서 2층 붉은 벽돌집을 지은 것이다. 다행히 길을 사이에 두어 좀 덜 답답하지만, 북악北岳의 원경遠景이며, 해마다 척척 늘어져 피던 능소화가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무척이나 섭섭한 일이다.

그 뒤, 이어서 삼각 정원 양옥 뒤에 벽돌 3층이 올라갔다. 양옥 주인이 세를 놓기 위해 지은 것이란다. 그 집이 들어서자 식탁에서의 전망은 정취가 반감됐다. 아담한 양옥 용마루 저편으로 펼쳐졌던 능선이며 골짜기가 멱을 잡히듯 꼭대기 쪽만 보이게 된 것이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하얀 집이 송두리째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10년 전 이사 올 때 툭 틔었던 사방이 이렇게 점차로 시계視界가 조여 버린 것이다. 이제는 이 이상 성城들이 높이 쌓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들어설 집이 다 들어섰기 때문이다.

도리어 차도 쪽 빈터에는 아주 높은 빌딩이 들어섰으면 한다. 공해公害의 방벽防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덕 위의 하얀 집! 불가사의하고 신비하기까지 한 그 하얀 집은 이제 보이지 않고, 한갓 마음속 영상으로만 남은 것인가? 나는 어느 날 하나의 기적을 만났다. 그 하얀 집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 돌아와 2층 현관문을 열려다 우연히 오른쪽으로 바라다보니 저 멀리 언덕 위에 그 하얀 집이 그대로 보이지 않는가! 신록新綠에 싸인 그 하얀 집은 단장을 새로 한 여인네처럼 더욱 청초하게 보였다.

순간, 나는 이쪽을 움직이면 막혔던 마음자리나 눈길이 확연히 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이제 마음속에 잠잠히 깃든 영상으로서가 아니라 훨훨 깃을 쳐 푸른 하늘로 끝없이 비상飛翔하는 상념想念의 씨가 될 것인가?

 

 

사랑 양반

 

 

우리나라 재래식 한옥韓屋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더라도 대개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그야 방 한 칸밖에 없는 집에는 이도 저도 가릴 바 못 되지만, 방이 둘만 돼도 男女의 거처 공간을 따로 설정했었다. 이는 아마도 내외법內外法이 엄격했던 시대상의 반영이 아닌가 한다. 바깥손님은 사랑채에서, 안손님은 안채에서 접대해야 할 필요에서, 단칸집이 아닌 바에야 그렇게 구분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거처 공간의 별정別定은 자연히 각기 다른 분위기雰圍氣를 빚어냈다. 사랑에는 엄격함과 위엄이 가득 차며, 안방에는 따뜻함과 포용성包容性이 감돌았다. 그러면서도 절도節度면에서는 안팎이 더하고 덜함이 없을 만큼 분명했다.

사랑에서의 큰 기침소리나 장죽長竹으로 놋재떨이에 담뱃재를 꽝꽝 울려 떠는 소리는 삽시간에 안채의 분위기를 긴장시키고, 혹시나 떨어질 엄한 분부를 맞을 채비를 차리게 한다. 그 순간이 별일 없이 지나갔을 때의 안도의 한숨은 얼어붙었던 겨울 뒤에 새 봄을 만나는 기분이다.

조선조 숙종肅宗 때 한지韓祉라는 감사監司가 있었다. 인품이 묵직하여 일찍이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에 노기怒氣를 띠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곤장棍杖을 두세 번 쳤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감영監營 안팎이 숨소리도 안 들릴 만큼 숙연肅然하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발자취 소리만 들려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감사가 행차하는 곳에 달리 금훤禁喧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쥐죽은듯이 행보行步를 멈추니, 그 까닭을 몰랐었다.

이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나오는 예화例話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牧民官은 말이 적고 위엄이 있어야 권위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가장家長도 마찬가지로 말수가 적고 위엄이 있을 때 권위가 선다. 그리하여 기침소리, 재떨이 울리는 소리에도 가족들이 정신을 차리는 풍조는 가도家道가 제대로 서 있다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규수閨秀란 말이 있다. 안방에서 자란 재색才色을 겸비한 처자處子를 이르는 말이다. 말씨와 행동거지行動擧止, 예의범절, 음식 솜씨와 바느질, 글씨며 글이 나무랄데 없이 훌륭히 갖춰진 나이 찬 처녀라는 뜻이다.

이러한 규수는 할머니나 어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다. 이는 옛날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집안에서 여자子女를 가르칠 수 있는 소양素養과 교양이 쌓이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전에 이름 있는 이들 가운데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 그리 된 사례가 많다. 맹자孟子가 그랬고, 율곡栗谷과 한석봉韓石峯이 그랬다.

조선조 성종成宗 6년(1475)에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우냐,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남자들이 밝으냐 어두우냐에 달려 있지만, 여자들이 착하냐 착하지 않느냐에도 달려 있으므로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하고, 《내훈內訓》 3권을 지어 여자들의 교본敎本으로 끼쳤다. 1권은 언행言行, 효친孝親, 혼례婚禮, 2권은 부부夫婦, 3권은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검廉儉이다. 이러한 부녀자들에 대한 교양서는 자연히 집안에서의 가풍家風과 자녀 교육의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중종中宗 때 사람 박세무朴世茂란 이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란 아동용 교재를 만들었는데, 그 속에 소학小學에서 뜻을 당겨서 쓴 이런 구절이 보인다. ‘남자는 밖에 거처하면서 안 일에 간섭하지 않으며, 부인은 안에 거처하면서 바깥일에 간섭하지 않는다.(男子居外, 而不言內, 婦人居內, 而不言外.)’ 부부가 각기 거처 공간을 중심으로 역할 분담을 하고, 서로 경계를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야말로 부부가 어디까지나 서로 인격人格을 존중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집안 살림은 여자 주인들이 했다. 살림의 주도권은 광열쇠로 상징됐다. 시어머니가 살림을 며느리에게 내맡길 때에는 광 열쇠를 내준다. 이렇게 예전의 안주인의 권위와 권한은 당당하였다. 그리하여 옛사람들은 부부간에 서로 공대를 하고 인격을 존중했다. 옛사람들의 가도家道와 부부의 도리가 눈에 잡히는 것 같다.

지금은 가옥 구조가 양옥화하여 사랑채와 안채의 개념이 없이 부부가 같은 공간에서 거처한다. 그리함으로 부부가 너무 가까워져 존경尊敬의 여지가 없게 되어 버렸다. 존경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늘 정다운 손님,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손님을 대하는 듯 신선감新鮮感, 신비감이 유지된다. 옛사람들이 댓구멍으로도 서로 보지 못한 생판 모르는 처지로 만나서 일생을 별탈 없이 꾸준히 살아간 것은 이렇게 적당한 거리감의 유지 때문이다. 게다가 대가족주의大家族主義로 층층시하에서 부부가 쉽게 만날 기회조차 없었던 환경이 항상 그리워함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요새 부부들은 서로가 너무 속속들이 샅샅이 사정을 알아 신비로운 구석이 없게 되어 버렸다. 같은 공간에서 거처하다 보니 세세한 행동 거지가 다 눈에 보이고, 그것의 총화總和가 그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실제 이하로 평가 절하評價切下를 하려든다. 연애戀愛로 맺어진 부부가 쉽게 헤어지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현명한 아내는 남편의 좋은 점을 子女들 앞에 부각시킴으로써 남편도 자숙하고 가도家道도 선다는 것을 잘 안다. 옛날 부인들은 바로 그것을 실천했다.

요새는 부부 사이의 호칭은 가령 남편을 ‘아빠’라고 하는 등 강상綱常에 어긋나는 잘못을 항다반恒茶飯으로 저지른다. 그런가 하면 아주 가깝게 사귀던 시절의 호칭을 그대로 연장시켜 ‘너’니 ‘나’라고 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사이가 너무 가까우면 완충緩衝의 여지가 없어 부딪치면 파탄이 오기 쉽다. 그런 점에서 종래의 호칭도 음미할 바가 있다. 남편을 ‘그이’ ‘우리 그이’ ‘우리 집 이’ 또는 ‘바깥양반’ ‘사랑양반’으로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사랑채는 없어도 말에서나마 ‘사랑양반’을 존속시킴이 남편의 권위, 따라서 가도家道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도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