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다시 읽는 글 ⑮ |추모의 글|

 

아, 참 하늘도 무심하구나

 

 

                                                                                             박재식

근년에 와서 우리 수필계는 세 분의 석학 수필가를 잃게 되었다. 재작년에 중문학자 한당 차주환閑堂 車柱環 선생, 지난 해에 철학자 우송 김태길友松 金泰吉 선생, 그리고 금년 3월에는 국어학자 난대 이응백蘭臺 李應百 선생, 이렇게 해를 이어 돌아가신 것이다. 사계의 석학으로 널리 알려진 세 분 선생은 공교롭게도 수필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우리 수필 문학 진흥의 중추 단체인 ‘한국수필문학진흥회’(이하 진흥회로 약칭)의 초기 회장을 역임(초대 우송, 2대 한당, 3대 난대) 하셨고, 이 조직의 중심 회원으로 구성된 ‘수필 문우회’의 중진으로 참여하여 직접 지도 육성에 당한 내력으로 세 분의 잇따른 타계는 아무리 무상의 조화라 하더라도 우리 수필계의 상실감과 애도의 정은 유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에 작고하신 난대 선생은 선생이 ‘진흥회’ 회장(1986~97)으로 재임하신 11년 동안 줄곧 필자가 부회장의 한 사람으로서 모신 인연으로 하여 그 애도의 정은 한층 남다르다.   

아시다시피 난대 선생은 ‘진흥회’의 기간 사업인 《수필공원》(지금의 《에세이 문학》)을 철석의 기반 위에 세운 중흥의 지도자이시다. 총회의 우격다짐 지명으로 3대 회장직을 맡은 선생은 그 무렵 《수필공원》이 재정관계로 운영난에 봉착한 실정을 알자 ‘한샘출판사’를 경영하는 서용운 씨를 설득하여 명목상의 ‘편집인’으로 등록시키고, 편집실을 그 출판사 안에 옮겨 간행에 따른 제작비의 부담을 떠맡겼다. 유명한 ‘한샘학원’의 창업자이기도 한 한샘 서용운 씨는 선생의 수제자로 평소 존숭하는 은사의 어려운 청을 받아들여 이후 10여 년에 걸쳐 《수필공원》의 간행을 맡아 뒷받침함으로써 자립 기반 조성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서울사대 국어과의 붙박이 교수였던 선생은 자상한 성품과 높은 덕망으로 하여 졸업 후에도 존경하며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 수필계만 하여도 작고한 김우현과 유병석을 비롯하여 정호경, 정진권, 손광성 등 쟁쟁한 멤버가 그 무리에 속하는 제자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측근에서 회장으로 모시면서 미상불 수긍이 갔다. 언제나 온화한 표정으로 넓은 깃에 감싸듯 수하를 대하는 살뜰한 포용력과 힘에 버겁고 까다로운 일일수록 몸소 챙겨 처리하고도 그 공을 내색하지 않는 웅숭깊은 도량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회장 개선에 휩쓸려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부회장 감투를 쓴 세 사람(필자와 작고한 공덕룡, 정봉구 교수)이 보필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우송 선생과 한당 선생으로 이어진 전임 회장 시절에는 ‘진흥회’의 어려운 살림은 운영위원들이 내는 뻔한 자금과 옴니암니의 비용은 주로 부회장들(여행사를 운영하는 김우현과 의사인 한형주 박사 외 한 분)의 지원으로 꾸려졌다는데 신임 부회장의 면면은 그런 구실조차 못하는 터수인지라 그 모든 무거운 짐은 회장님의 경륜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필자는 어느 민간 협회의 낙하산 임원으로 있는 것을 기화로 회원사의 눈치와 담당 직원의 난색을 무릅쓰고 고작 몇 차례 광고료를 보태는 걸로 체면치레를 하며 어영부영 지내다가, 그나마 임기가 끝난 ‘91년에 충북 월악산 골짜기로 낙향하였으니 지금 생각하여도 난대 선생 시하에서 부회장을 지낸 명색이 스스로 민망하기만 하다. 그래도 자상하신 선생께서는 산골의 필자에게 이따금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하고,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진흥회’의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면서 무심하게 지낸 필자를 당황하게 만들곤 하셨다. 가끔 상경하여 ‘수필 문우회’의 월례 모임에 참석하면 희한한 반색으로 대해 주시고, 해산 후는 으레 다른 문우들과 함께 근처의 단골 다방으로 이끌어 허물없는 정담으로 그동안의 회포를 녹여 보내주시곤 하였다.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가을 어느 날 선생께서 두 부회장과 간사인 박연구 씨를 동반하고 “적막 산중의 외톨박이살이가 궁금하여 왔다.”면서 산골 집으로 일껏 찾아와 필자의 코끝을 찡하게 만든 일이다. 그 때 대문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늘 책상 위 유리판 속에 끼워 놓고 바라보면서 차례로 유명을 달리할 때마다 무상감에 젖곤 했는데 ‘이제는 난대 선생마저 가셨으니 정작으로 외톨박이가 되었구나.’하는 서글픔이 가슴을 메운다.  

이런 선생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노생의 부실한 건강 탓으로 문병조차 못하고 떠나셨으니 죄스럽고 비통한 마음 못내 가눌 길이 없다. 언젠가 선생께서 중병을 앓고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시다가, 주치의 몰래 기치료사氣治療師를 불러들여 시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자랑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 이번에도 필경 그런 기적에 의해 다시 일어나시리라 마음속 은근히 믿고 바랐었는데. 아, 참 하늘도 무심하구나.

 

 

《월간문학》으로 등단.

《현대문학》, 《수필공원》 신인추천 심사위원 역임.

수필집 《바람이 머물고 간 자리》, 《대장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