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구나무

 

 

                                                                                       이상규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여름방학 때면 찾는 고향 마을 앞 시냇가에는 아름드리 둥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수명이 몇백 년이나 되었는지 모르나, 어린 내 눈에는 엄청 큰 나무였다. 둥치는 내 또래들 두셋이 팔을 벌려야 겨우 닿을 정도였으니 알 만한 일이다. 그 나무는 어찌나 가지가 많이 뻗었는지 나무 그늘이 여간 넓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름 한철은 그 나무 밑이 피서지요, 마을회관이며 누구나가 찾는 쉼터였다. 나무 아래 그늘은 대개 어른들 차지가 되다 보니, 동네 아이들은 나무 위에 올라 수다를 떠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고 보면 오래된 고목은 여간 대견스런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는 잘리어 재목으로 쓰이는 운명이겠지만, 우선 고목이 되었다는 그 자체만 해도 대견한 것 같다. 수많은 어린 나무들이 밟히고 잘리고 하여 제대로 커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데, 용케도 살아남아 동네 앞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서서 정자亭子나무의 반열에 올라 위용威容을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무가 오래되어 마을 앞 둥구나무쯤 되면 누구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한다. 이미 그것은 단순한 나무의 격을 넘어선다. 신이 깃든 나무로 승격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뭄만 심해도 그 나뭇가지에 부적을 붙이고 제를 올리고, 동네에 괴질怪疾만 퍼져도 그 나무에 금줄을 처서 잡인의 마을 출입을 금한다. 그러니 그 나뭇가지 하나도 마음대로 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야말로 목신木神 대접이다. 오래 살아 커지고 볼 일이다.

이미 꽤 오래된 일이지만, 성묘를 위해서 고향 마을 앞을 지나다 보니 둥구나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그마한 육모정이 서고, 길 건너에는 시멘트 덩어리인 마을회관이 들어선 것이 눈에 들었다. 몇백 년에 걸쳐 그 자리를 지키던 둥구나무가 개발이라는 이름에 밀려 자리를 내주고, 보잘 것 없는 인조물人造物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저 한 평 남짓한 정자나 시멘트 덩어리인 마을회관이 과연 둥구나무의 구실을 대신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근년에 들어 의약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의식주衣食住의 여건이 개선되다 보니 사람의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났다. 60년대만 해도 환갑을 맞으면 상노인행세를 했지만, 지금은 희수喜壽쯤 되어야 겨우 노인 반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고, 80대는 되어야 노인 행세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몸에 좋다는 것은 사양하지 않는다. 얼마나 살아야 흐뭇해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기야, 나무쯤 되면 오래될수록 위용威容을 더하고 사람을 위한 구실도 많아져서 대접도 융성해지겠지만, 사람은 늙을수록 외모가 시들고 거동이 불편하며, 정신마저 흐려지면 가히 폐인廢人에 가깝게 된다. 남을 돕지는 못할망정, 남에게 큰 불편이나 폐가 되는 천덕꾸러기는 되지 않는 것이 좋다.

며칠 전에 신문을 읽다 보니, 정부당국에서는 그동안 노인에게 부여한 ‘전철무료승차’제도에 대한 개선책을 놓고 고심 중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당국에서는 65세 이상인 노인인구가 급증하면서 전국적으로 전철 운영에 적자가 생기는 주요인의 하나로 노인의 무료승차를 꼽는 것 같다. 그 발상發想의 옳고 그름이나, 경로敬老 여부의 문제를 떠나, 사람의 평균수명이 늘다 보니 노인에 대한 인식이 이쯤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이순耳順과 종심從心의 나이를 넘기고도 마음을 내려놓고 상相을 떠날 줄 모르는 데서 오는 업보인지도 모를 일이다. 전해 오는 말에 수즉욕壽則辱, 곧 오래 사는 것이 욕됨이라는 말이 있다. 동물과 식물의 큰 차이점의 하나는 오래됨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법조인. 문교차관. 고대법학과 교수, 환태평양 변협회장 등 역임.

회갑 후에는 《금강경》,  《아함경》  등 불경 연구로 삼매중.

수상집  《삶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