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파도

 

 

                                                                                          엄정식

우리는 보통 파도를 보고 바다를 보았다고 말한다. 흔히 바닷가에서 우리가 본 것은 출렁이는 파도일 뿐이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때도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멀리서 넘실거리는 혹은 가까이서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일 뿐이다. 그러나 파도를 볼 때 바다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을 보았다고 할 수 있듯이 파도를 통해 우리는 바다를 보는 것이다. 파도는 바다의 일부이고 바다는 비유이긴 하지만 파도를 통해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도를 볼 때 바다를 본다고 해도 아주 잘못된 표현은 아니다.

우리가 파도를 볼 때 바다는 파도의 일렁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파도를 보았다고 해도 바다를 본 것은 아니다. 바다는 단순히 파도들의 합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파도에 관한 관찰을 통해서 파도가 지금 거기서 그렇게 넘실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악한다면 어느 정도 바다의 존재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직 바다의 실체를 알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식의 능력, 말하자면 결국 실험과 관찰, 그리고 추론을 통해서 알아낸 바다일 뿐이다. 그것을 우리는 바다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의 특징은 그 탐구 방법에 있다. 과학자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능력만을 활용한다. 비록 전문적인 차원의 가설을 설정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실험과 관찰에 임하며 명석한 두뇌로 추론을 펼치지만 그것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평상적 능력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과학적 법칙에 의거해서 파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관해 설명할 수 있지만, 항상 그러한 설명이 제한적이고 또 틀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인식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설명이나 예측이 잘못되었을 때 그 오류를 기꺼이 인정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이러한 방식과 태도 때문에 과학적 지식은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바다에 관하여 더 많은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비록 그들은 일기예보에서 보여주듯이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항상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우리가 과학을 함부로 외면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종교가들은 우리가 보는 것은 파도일 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기서 ‘자신 있다.’는 것은 파도와 바다의 관계를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마치 사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 형태와 붉은색일 뿐이라고 할 경우 사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때에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파도뿐만 아니라 바다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경험의 방법으로는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수한 지식, 가령 계시나 ‘깨달음’이라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의 내용은 바로 그것이 특별한 사람들의 특수한 지식이기 때문에 범상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는 그러한 지식의 내용을 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득도한 사람들의 안타까움이며 종교적 지식이 가진 문제점이기도 하다.

철학은 과학과 종교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비록 사변적인 경향이 있지만 과학자들처럼 논리적 추론에 의지하며, 그러나 그들처럼 실험과 관찰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한편 철학자들은 바다가 있어야 파도도 있을 수 있다고 믿지만 종교가들처럼 특수한 인식이나 직관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바다의 실재에 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한다. 철학자는 파도를 자세히 관찰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음미하며 바다를 그리워한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중에는 시인도 있다. 시인 중에는 파도를 본 적도 없으면서 바다를 그리워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파도를 본 적이 있는지의 여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모든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희생자들이 탄 영원한 흔들 배’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던 젊은 시인 랭보 (Arthur Rimbaud)는 파도를 본 경험을 갖지 않은 채 바다를 노래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계속 노래한다.

 

‘그때부터 나는 별들이 잠겨 있는 우윳빛 바다,

초록빛 창공을 탐식하는 바다의 시 속에서 헤엄쳤다네.

거기엔 창백하고 넋 잃은 부유품,

생각에 잠긴 익사체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네.’

 

이 익사체는 분명히 어떤 철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를 조종하고 종교가는 비웃으며 노래를 이어간다.

 

‘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네,

저 푸른 바다의 만새기를, 황금빛 물고기를, 노래하는 물고기들을--

꽃 같은 거품들이 나의 표류를 흔들어주고

때로는 형언할 수 없는 바람이 내게 날개를 달아주었네.’

 

이렇게 해서 그에게 바람은 파도가 되고 파도는 모두 거품을 일으키며 바다 속에 흡수된다. 17세의 랭보가 고향 샤를르빌을 떠날 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바닷가를 그리며 노래한 〈취한 배〉의 구절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떤 파도가 보아낸 파도들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수필집  《당진일기》, 《행복한 철학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