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끝 무렵

 

 

                                                                                       허창옥

새는 강에 오래 머물고 있었다. 방심했고 안이하였다. 아직은 여름인가 했는데  갑자기 먼 산 눈바람이 강 위로 불어온 게다. 자신이 여름새임을, 미리 길을 서둘렀어야 했음을 칼바람이 깃털을 헤집고 들어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뼛속까지 시리다. 겨울은 춥고 길다.  

새는 가벼운 존재다. 티 없이 깨끗한 존재이며 무한자유를 누리는 탁월한 생명체다. 아득한 창공을 날 때 그 빼어난 자태는 그대로가 예술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보았다. 계속되는 한파로 신천新川이 얼어붙었다. 아침저녁 신천을 지나며 황홀하게 바라보던 하얀 새 백로들이 어느 날인가부터 우중충한 몰골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여름이 길어져서 새들이 착각을 하였다. 그래서 떠날 시기를 놓쳤다.’는 지역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혹서와 혹한이 예측불허로 몰아닥치는 이 지구상에서 꽃이 필 때를 잊고 새가 날 때를 잊어버리는 건 더 이상 기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새들은 날로 추레해져갔다. 햇살과 미풍에 씻겨서 윤이 나던 깃털에는 먼지가 앉고 때가 끼었다.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눈부시게 하얗던 새는, 마치 이울 때의 목련꽃잎처럼 누르칙칙하였다. 움직임도 눈에 띄게 둔해졌다.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미련스러울 만큼 굼뜨게 보였다. 부리와 머리, 긴 목에 이르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어깨에 파묻고 뭉툭한 몸통과 가느다란 다리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임에도 새가 강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이야 알고도 남는다. 무릇 목숨이 붙어있는 생명체에게는 먹이가 절체절명의 명제인 것이다. 애련하다. 생명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이 새와 나 그리고 모두의 숙명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새들이 대체 어디에 몸을 부려놓고, 언제 잠을 자는지, 과연 이 겨울을 견뎌내기나 할지에 대한 나의 염려는 수은주와 반비례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었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넘나들던 날, 일터 맞은편의 포장마차가 당국에 의해서 철거되었다. 젊은 부부가 ‘오뎅’과 호떡을 파는 곳이다. 그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인 아침이라 애가 탔다. 남편이 나가서 만류하고, 내가 나서서 통사정을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미 수차례 통보하였고 어제 저물녘에도 와서 최후통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급히 오고 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주인이 있을 때 가져가라고 부탁했으나 허사였다. 옷을 하도 많이 껴입어서 걸어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 보이는 작달막하고 당찬 여자와 시퍼렇게 언 무 같은 어설픈 남자를 보면 ‘춥다.’는 말이 사치스럽고 민망하다. 먹이를 구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혹한이 잦았고 먼데는 여전히 폭설이 쌓여있지만 봄은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던 게다. 아직은 그 걸음이 매우 더디지만, 봄의 정령이 기웃거리는 낌새가 여기저기 보인다. 매화가지에 자줏빛 꽃눈이 맺혔다. 그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포오란’ 꽃받침이 금방 열리고 얇디얇은 꽃잎이 방싯 벙글 것도 같다. 설한풍을 잘 이겨낸 것이다.

언 강이 풀렸다. 몸집 자그만 오리들이 물 위를 동동 떠다니고 더러는 하얀 물길을 그으면서 경쾌하게 헤엄친다. 한창 자맥질에 몰입한 녀석도 보인다. 더불어 겨우내 마음 아리게 했던 백로들도 활기를 되찾은 듯하다. 새는 예의 그 S자 몸매를 한껏 드러내놓고 여유롭게 서 있다. 이제 곧 한 마리 두 마리 여러 마리가 비상과 하강을 거듭하면서 강 위를 날겠지.

올 가을에는 새가 때를 잘 가려서 날아갔으면 좋겠다.(백로 중에도 겨울새가 있다고 한다. 신천에서 겨울을 난 새가 겨울새인지 떠나지 못한 여름새인지 나로서는 구별할 수가 없다. 다만, 명색 겨울새라면 그토록 추레한 몰골일 수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벌금을 물고 찾아온 포장마차를 골목길로 옮긴 젊은 부부도 다시 오는 겨울에는 형편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창공이 저들의 차지이며, 온갖 벌레와 열매들이 저들의 것이며 매일 데 없이 자유로운 새에게도 겨운 계절은 있는 법, 그것은 형이하학의 겨울이며 동시에 형이상학의 겨울이다. 그 겨울이 누그러지고 있는 2월이다. 2월은 짧다. 그리고 2월의 끝에 꽃피는 봄이 온다는 걸 새도 알고 사람도 안다.

 

 

《월간 에세이》로 등단(90년). 대구에서 약국 경영.

작품집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