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너머로

 

 

                                                                                       박은서

초록 텃밭에는 소박한 꿈의 열매들이 이슬을 머금고 있다. 계절의 변화가 한눈에 드러나는 텃밭의 봄은 온갖 푸성귀들이 싱싱 자란다. 살랑대는 아침 바람이 살포시 얼굴을 감싸기도 하고 부드럽게 손등을 간질이기도 한다. 숨을 몰아쉬니 은은한 풀잎 향이 폐 깊숙이 스며든다. 별도 달도 꽁꽁 숨어버린 아침이 이슬을 머금은 꽃잎으로 열리고 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 오이에 눈길이 간다. 툭 딴 오이에는 싱그러움이 묻어 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부추 전을 만들기 위해 부추 한 움큼과 풋고추, 방아 잎으로 바구니는 금세 푸짐해진다.

아침 밥상엔 새롭게 가지 무침이 올려졌다. 아직 여물지 않은 것인데 어머니는 가지를 따고 싶었던 모양이다. 며칠만 더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접는다. 가스레인지 위 뚝배기에서 된장찌개가 끓고 있다. 방아 잎 한 움큼을 넣으니 그 독특한 향이 쏴아 퍼진다. 갈치구이나 고등어 졸임을 번갈아 올리기도 하지만 달리 장을 보지 않아도 밥상은 늘 풍성하다.

서울에 살던 오빠가 경상남도 김해시의 산업단지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도 어언 4년째로 접어든다. 사무실 옆에는 빨간 벽돌로 지은 아담한 집이 한 채 딸려 있다. 오빠는 그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다. 시골에서 산 적이 없는 오빠는 이웃의 조언을 얻어가며 텃밭을 일구더니 요즈음에는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졌다. 철따라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틈만 나면 잡초를 뽑고 벌레도 잡는다. 담배를 피울 때도 텃밭을 서성이며 피웠다. 오빠의 정성으로 텃밭은 나날이 생동감으로 넘실댔다. 처음에는 어설픈 티가 물씬 나더니 이제는 제법 구색을 갖춰 입맛 당기는 유기농 밥상을 차리는 데 손색이 없다.

텃밭 주변에는 유실수가 무성하다. 잎을 늘어뜨린 과실나무들은 철따라 순박한 시골의 정취를 한껏 자아내곤 한다. 매실이 굵어지면 광주리 가득 따 씻어 말린 후 꼭지를 빼내 커다란 항아리에 설탕과 함께 담아둔다. 항아리 속 매실이 숙성의 시간을 거쳐 매혹의 향기를 뿜어낼 날을 기다리는 건 풋풋한 설렘이었다. 키보다 한참 큰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를 따느라 목이 아프도록 대추나무 아래를 맴돌기도 했다. 특히 마당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붉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은 마음속의 풍경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양념장을 만들 때 매실즙을 넣으면 독특한 맛이 난다. 또한 매실즙에 얼음 몇 조각을 띄운 그 특유의 향과 맛의 어울림은 환상에 가깝다. 잘 익은 감은 평소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와 오빠도 달게 먹는다. 계절 따라 바뀌는 풍성한 먹을거리와 운치 있는 풍경은 도시에서 자란 사람에겐 특별한 의미를 안겨준다.

몇 해 전부터 시골을 자주 오고갔다. 어머니의 건강 때문이었다. 햇살이 어깨 위로 손등 위로 쏟아지는 아침나절, 봄빛이 완연한 들녘에선 파릇파릇한 새싹들의 속삭임이 바람을 타고 나뭇가지를 흔든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어머니와 함께 쑥을 캔다. 마침 비온 다음날이라 손끝에 와 닿는 느낌이 사뭇 부드럽다. 생기를 머금은 쑥의 밑동을 싹둑 잘라 바구니에 담으니 된장을 풀어 끓인 쑥의 향이 밥상을 채우던 유년의 기억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문득 고개를 드니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은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 한 점이 떠 있다. 어머니는 쑥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가 보다. 웅크리고 앉아 쑥을 캐고 있는 뒷모습이 한없이 작게만 보인다.

모든 일에 애착이 유난하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요사이 초점 잃은 눈빛으로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다. 하루의 대부분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지만 텔레비전을 보기보다는 어느 꿈나라를 여행하는 듯 허공에 눈을 주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어쩌면 먼먼 유년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표정으로 읽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심히 앉아 있지만 아침상을 물리면 언제쯤 딸이 훌쩍 가버릴까 탄식처럼 던지는 말.

“서울은 언제 가노?”

밥상 너머 어머니의 눈빛이 어린아이처럼 간절하다.  

 

박은서(개명 전 박용화)

《계간수필》로 등단(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