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온 편지

 

 

                                                                                      고임순

눈이 내린다. 세설이 내리더니 점점 눈발이 굵어져 함박눈이 쏟아진다. 깃털처럼 가벼운 눈송이의 화려한 원무圓舞. 도대체 눈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늘에서 갓 내린 눈을 돋보기로 관찰해보면 6각형의 예쁜 꽃과 같은 모양이라 한다.

눈은 높은 하늘 아주 추운 곳에서 수증기가 곧바로 얼음 알갱이가 되어 구름 속을 떨어져 내려오는 동안에 커다란 결정結晶으로 커가는 것이라고. 기온이나 습도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커지는 이 눈의 결정은 상공의 기상 상태도 알려 준다. 그래서 눈은 하늘에서 보낸 편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눈이 쌓인다. 하늘의 편지가 쌓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편지를 채 읽기도 전에 쌓이고 쌓이는 눈은 폭설이 되어 온 누리를 덮는다. 혹한이 계속 이어져 눈은 거대한 흰 몸을 대지 위에 엎드린 채 일어서지 않고 있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면 겁이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신비로운 설국을 찾아가고 싶어진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눈이 많이 내렸다. 태백산맥 기슭, 강원도 대관령에는 무려 87센티미터의 눈이 내렸다는 기상 보도가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없이 우리 가족은 설 연휴를 맞아 용평을 향해 떠났다. 고속도로는 눈 내린 흔적이 희미했으나 횡계에 들어서서부터는 은세계가 펼쳐져 대설이 내린 것을 실감했다. 눈부신 설원, 용평 스키장을 바라보며 좌로 도암댐으로 가는 좁은 눈길을 한참 가다 보니 산기슭 적설 속에 ‘송운산방’이 푹 파묻히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 속을 헤치고 걸어가니 현관 옆 몇 그루 자작나무가 반겨주는 게 아닌가. 수북하게 솜처럼 쌓인 눈 속에 흰 살갗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자작나무. 설레는 가슴으로 우러러보는 내 사랑 겨울나무여. 폭신한 흰 눈은 따뜻한 솜이불인 양  상처투성이의 키 큰 나무를 보듬어 감싸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사방을 돌아본다. 소나무 가지마다에 눈과 얼음이 뭉쳐 생기는 눈꽃 수빙水氷, 마치 모자를 뒤집어쓴 것같이 가지들이 처져 있다. 이것은 눈이 쌓여서 된 것이 아니고 과냉각 물방울로 이루어진 안개 알갱이가 얼어붙어서 생긴 것이라고. 풍부한 눈과 과냉각 물방울, 찬 계절풍과 낮은 기온이 만들어내는 겨울눈이 연출한 예술 세계에 빠져든다. 그 모양도 가지가지여서 도깨비 모양이 있는가 하면 새우 꼬리 모양, 칫솔 모양, 접시꽃 모양 등 다양하다.

산방 뒤 야산을 오른다. 맑게 갠 하늘, 새하얗게 빛나는 눈 때문일까. 마치 눈이 내리면서 씻어낸 듯 하늘은 어쩌면 저토록 깔끔할까. 아니나 다를까 눈이 올 때에는 공기 속의 작은 먼지도 함께 섞여 내리기 때문에 눈은 하늘의 청소부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빽빽한 잣나무들이 눈바람을 뒤집어쓰고 나무 자체가 얼음 기둥이 되어 있는 신비롭고 황홀한 모습들. 내 인생 최고의 설경에 취한다.

산 중간쯤 오르면 넓은 평지가 펼쳐지고 그곳에 서면 하늘이 훤히 뚫려 나를 바라보는 눈길을 느낀다. 사방 천지 햇빛에 펼쳐진 눈세계, 보석을 뿌린 듯 반짝거리는 모양을 보면 눈이 부시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추억에 잠겨 마음의 위안을 받고 거듭나게 된다. 내가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그리며 추억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도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내리던 비원의 고궁 뜰을 거닐며 우리는 서로의 마음 문의 빗장을 열었다. 눈처럼 순수한 성품이 눈 녹은 물처럼 내 마음으로 흘러들어올 때 나도 눈같이 거짓 없고 해맑은 여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평소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내걸었던 사뭇 까다로운 조건들을 멀찍하게 밀어내고 오직 한 남자의 진실된 마음만을 부각시켜주던 눈세계.

이렇게 만난 우리가 백년가약을 맺던 날도 흰 눈이 펑펑 쏟아져 쌓인 한겨울이었다. 웨딩드레스 자락을 적시던 눈 덮인 계단을 오르며 얼마나 추위에 떨었던가. 그러나 눈은 하늘이 주신 축복이라고 행복감에 젖어 떠났던 신혼여행 길. 온양 온천장 마당도 은세계 일색이어서 마음이 한없이 부풀었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을 내고 걸으면서 뒤돌아보고 이렇게 선명하게 살자고 마주 보고 웃었다. 이렇듯 눈은 우리 둘을 맺어준 중매 노릇을 한 셈인가.

설인雪人 같은 남자. 유난히 흰빛을 좋아한 남편은 늘 나에게 흰 옷을 입으라고 권했다. 흰 블라우스를 입으면 얼굴이 한결 살아난다고 생일선물로 사 주기도 했다. 구혼여행도 겨울의 설악산에서 눈 속을 누비며 흰 빛을 즐겼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설국을 유람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다음 노후에 함께 세계 일주를 하며 알래스카, 시베리아, 북극 등을 여행하자고. 시집살이에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꿈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노년이 되어 둘만 남았다. 그런데 옛날에 상상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건강을 잃고 병치레하느라 바빠진 그 많은 나날들, 남편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신부전증으로 급기야 투석 치료를 받게 되었다. 병상의 남편은 늘 내 손을 꼭 잡고 함께 가자고 했다. “어딜?” “아주 좋은 곳, 가보면 알아.” 어린아이처럼 말하던 남편은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어느 날, 슬그머니 내 손을 놓고 먼저 떠나가버렸다. 지금쯤 유럽여행을 마치고 그렇게 가고 싶었던 북국의 흰 눈 속에서 곰과 노닐고 있을까.

적막이 흐르는 산, 우리 이야기가 무늬져 있는 눈세계 속에서 나만이 볼 수 있는 빛들을 찾아본다. 사랑의 진분홍빛, 그리움의 연보랏빛, 그리고 외로움의 담묵淡墨빛 등을. 나에게 가슴속 열정을 아낌없이 다 털어주고 진공상태가 되었는가. 말 수 적고 사려 깊은 사람.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평생 흰 빛을 좋아한 화안열색和顔悅色의 얼굴만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바람이 분다. 하늘이 점점 흐리더니 눈발이 날아온다. 눈앞으로 하늘에서 온 편지가 떨어진다. “거대한 빙하와 끝없이 펼쳐진 눈 쌓인 황야, 신비스런 알래스카의 흰 눈 속에서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고.  

 

 

이화여대, 협성대 강사 역임. 양덕연묵회 회장.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약속》,  《내 안의 파랑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