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거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봄볕이 아른아른 흔들린다. 인형을 등에 업고 밥상을 차리는 손녀의 등에서 금실을 잦는다. 아직 모음과 자음이 불확실한 손녀는 종일토록 조잘조잘 평생 동안 사용할 말을 연습하느라 입이 한시도 쉴 짬이 없다. 꽃잎 같은 입술을 나불대며 쪼그만 도마를 꺼내어 플라스틱 칼로 피망을 썰고, 양파를 썰고 표고버섯을 썰어 찌개를 끓인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손녀에게 밥상을 받는다. 제가 쓰고 있는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상을 차려 할미 앞에 내놓고 같이 먹자고 한다. 나는 매번  빈 입을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어준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녀석은 등에 업힌 인형을 내려 품에 안고 인형에게도 장난감 젖병을 물린다.     

아이가 노는 양을 지켜보노라면 “네가 봄이로구나, 네가 봄꽃이로구나.” 구음謳吟이 저절로 나온다. 내 생애에도 저런 봄날의 언저리에서 소꿉놀이를 했었지. 밤새 베고 잤던 베개를 등에 업고 여릿여릿 피어난 산괴불, 꽃다지 따다가 반찬을 만들고 고운 모래로 밥을 지었었지. 여자의 일생이란 그렇게 시작된 소꿉놀이가 조금 더 커졌을 뿐인 것을, 그 테두리의 연속임을 아이는 아직 모른다. 그냥  이쁜 네 살이다.

장래 엄마가 될 아이는 소꿉놀이를 하면서 차츰 홀로서기를 하게 될 것이다. 금년 3월이면 어린이집으로 가게 된다. 처음으로 저 혼자서 공동생활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호기심으로 설레기도 할 터이다.

아직 밖에는 바람이 차다. 겨우내 부랑하던 겨울바람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삭아빠진 가랑잎을 들쑤시거나 전선줄에 매달려 용을 쓴다. 하지만 그런 위세는 패전을 뻔히 알면서 칼을 휘두르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자존심에 불과하다. 진퇴를 분명하게 판단하지 못한 지휘관의 자존심이란 책임을 통감하고 자진한 용장의 낡은 군화만도 못하다.   

손녀를 불러다 앉히고 무지개 놀이를 편다. A4 용지 두 장을 들고 현관유리창 앞으로 다가가선 면도리친 유리면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흔드는 놀이다. 면도리친 유리의 간격이 5밀리미터이다. 5밀리미터 유리면으로 굴절하는 빛이 무지개로 거실 바닥을 비출 때, 흰 종이를 들이대면 일곱 빛으로 곱게 내려앉는다. 이때 손녀는 ‘빨주노초파남보’를 음계처럼 부르면서 종이에 뜬 무지개를 흔들어댄다. 너울너울 일곱 빛 색깔이 춤을 춘다. 이번에는 종이를 반원으로 접어 옆으로 기울이면 빛깔이 하르르 쏟아진다. 쏟아진 무지개를 다시 뜨는 놀이에 신바람난  손녀가 묻는다.

“하무니는 무슨 색이 제일 좋아?”

“난 보라색이 제일 좋다.”

일곱 가지 색 중에서 제일 흐린 보라색이 애잔하다. 맨 나중에 뜨는 보라색에선 왜 계면조 같은 애잔함이 묻어나는 걸까.

이번엔 할미가 묻는다.

“너는 무슨 색이 좋은데?”

“주현이는 노랑하고 초록이 좋아.”

노랑도 초록도 봄의 빛깔이다. 봄은 노란 털이 감실감실 묻어나는 산수유와 연둣빛으로 물오른 생강나무를 앞세우고 사뿐사뿐 안단테로 걸어온다. 그러다가 붓에 속도가 붙으면 연둣빛을 듬뿍 묻힌다. 겨우내 적설에 묻혀 있던 능선이며 골짜기며 묵정밭에다 알레그로로 붓질을 해대면 온 산하가 연초록으로 물결친다.

손녀와 소꿉놀이를 거둔다. 밖으로 나와선 마당가에 심어 놓은 마늘밭에 쪼그리고 앉아선 검은색 비닐을 살짝 들추고 왕겨를 살살 헤쳐 본다. 봉인된 비밀문서를 살짝 뜯어보는 기분이다. 봉인된 문서 안에는 마늘 싹이 병아리 주둥이처럼 솟아나 있다. 나는 인형을 업은 손녀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약간 높은 음으로 “새싹”이란 새로운 단어를 가르쳐준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새싹’이란 낱말에 흥분한다. 등에 업힌 인형의 긴 속눈썹 위로 햇살이 무장무장 쏟아진다.  

어디선가 병아리가 종종걸음을 치는 것 같다. 그렇다. 봄은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는 계절이다. 그러고 보니 마을 어귀에 사는 현주씨네 암탉이 알을 낳을 때가 되었다. 어쩌면 피 묻은 첫 알을 벌써 낳았을지도 모른다. 둥우리에서 알을 낳고 내려와 꼬꼬댁거리는 암탉과, 날개를 옆으로 부풀리며 암탉에게 다가가는 수탉의 늘름한 폼이 눈에 선하다.     

이제 나비도 곧 날아올 것이다. 노랑 나비 흰 나비 춤을 추며 오리라. 장끼와 까투리가 짝짓기를 하고, 송곳니가 보배인 짐승들도 숲에서 새끼를 치고 젖 분배를 위해 슬쩍 옆으로 누워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에게 젖을 물릴 때가 가까워진다. 봄은 이래서 만물이 번성하는 계절이고, 어린 손녀의 꿈이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오르는 계절이다.

 

 

《수필문학》 으로 등단.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수상.

저서 《수렛골에서 띄우는 편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