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게 들리던 아리랑

 

 

                                                                                박영자

비행기로 7시간을 타고 내린 말레이시아는 계절이 겨울날인데 30도를 웃도는 더위였다. 서울에서 입고 온 겨울 코트가 무겁다는 생각보다 보는 사람 눈에 거슬릴 것 같아 얼른 벗어 손에 걸치고 공항을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일 뿐, 이곳 사람들은 상대가 무엇을 입었든 자신의 일 외에는 관심 밖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튿날 로비에 나오니 호텔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내가 오던 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도착한 지 삼 일이 지나는 날이다. 아침을 호텔 뷔페에서 먹고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멜라카에 가기로 하였다.

쿠알라룸푸에서 차로 2시간, 좌우 길가엔 팜트리 농장이 푸른 숲을 이루어 가로수를 심어 놓지 않아도 시야가 온통 녹색이다. 대추알만한 열매가 뭉치지어 머리에 이고 있지만 멀리서는 열매는 보이지 않고 잎만 무성하게 보인다. 해마다 이 열매가 수출 효자 상품이라고 하여 가는 곳마다 들녘엔 팜트리나무가 심어져 있다.  

허름한 건물이 밖에서 보면 박물관이라는 긴장감이 들지 않고 이웃집을 방문한 듯 편안하게 보였다. 넓은 주차장엔 세워놓은 차량이 별로 없고 주차비를 받는 사람 또한 보이지 않는다. 매표소 직원은 입장료를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는 듯이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출입구에 들어서도 머릿수를 세지 않는다.

말레이시아는 14세기에 수마트라 섬을 지배했던 왕국이 군대에 쫓겨 피신한 파라메스바라에 의해 이슬람 왕국을 세운 나라였다. 한때는 중국과 무역을 통해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부강한 나라였다. 건국 시기가 짧다고 해서 강대국의 탐욕이 빗겨 가지 않는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였을까. 600년 세월 속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의 침략을 차례로 받은 극한성을 넘은 나라였다는 사전 지식을 가졌기에 나는 박물관의 전시를 여행객의 호기심으로만 지나칠 수 없었다.

백여 평 남짓한 아래층에는 한눈에 말레이시아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나는 아직 이토록 솔직하게 외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 보이는 전시관은 보지 못했다. 침략국가의 나라 이름과 연대를 순위대로 밝혀 놓고 2m정도 높이에 마네킹이 실물처럼 침략국의 의상을 입고 손에는 그 나라 국기까지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네킹이 미소를 띠지 않고 있었지만 기쁨과 흥분은 보이지 않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가정사도 집안의 허물은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하물며 외침으로 당한 국가의 수난을 어찌 밝히고 싶었을까. 마네킹 앞에 한참을 서서 생각에 잠겨 본다.

단일 민족임을 내세우지 않는 이유 때문일까. 낙천적 국민성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자성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나는 고적이나 유물, 예술품에서 받는 감동보다 마네킹이 주는 포즈에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말레이시아 인의 국민성을 보는 듯하였다.

전시된 소총과 칼이 전등불을 받아 붉게 녹슨 채로 색채가 선명하다. 뺏고 빼앗긴 정변 속에 얼마나 많은 목숨을 베어내고 저 무기는 유리관 속에 조용히 안치되어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 6?25전란을 겪은 나로서는 숙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백 년의 세월 속에 다섯 나라의 침략을 받았다면 통계학으로는 한 세기에 한 번씩 겪은 전쟁이었다. 어쩌면 전설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할 수도 있었던 나라였으리라. 허망한 세월 속에 지내온 그때의 참상이 보이는 듯 부질없는 걱정이 되어 중국 고창국에서 보았던 ‘누란’ 도시가 떠올랐다.

누란은 타림강 노브노르 호수로 흘러드는 삼각주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현장법사와 공주의 아름다운 전설이 있는 평화스러운 나라로 한때 서역에서 경제, 문화가 번성했던 나라였다. 다크라마칸 사막을 건너오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던 당의 침략은 누란을 이 지구상에서 역사의 기록도 없이 폐허만 남겨 놓았다.

그토록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의연히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하고 오늘을 이루는 말레이시아는 지금 철강과 고무 생산지로 20세기 세계화를 꿈꾸고 있지 않은가.

우측 기둥을 돌아 진열장 앞에 섰다. 특이한 의상을 입고 혼례의식을 치루는 풍습을 재현해 놓은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었다. 혼례식이라면 한  쌍의 신부 신랑만 예복을 입고 있는 것이 보통 볼 수 있는 혼례 의식인데 이곳에 전시된 신부 신랑은 두 쌍의 혼례 모습이었다. 안내자에게 물으니 자국민과의 결혼식 모습과 다른 나라 사람과 짝을 맺는 부부의 혼례식 모습이라고 하였다. 자국민의 결혼식과 국적이 다른(중국, 인도, 파키스탄 )신랑과의 혼례식은 다르다고 했다. 국적이 다른 남자는 ‘바바’라 하고 신부는 ‘뇨냐’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이름을 페라나칸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타 민족과의 결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들만의 혈통을 이어가며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최초에 중국인이 들어온 것은 15세기 명나라에서 많은 뱃사람과 상인들이 들어와 부를 이루면서 이 땅에 정착하여 말레이시아 여인과 결혼해 두 나라의  혼합된 문화를 만들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사소한 일이 역사의 기적을 만들 듯이 두 나라 왕과 술탄의 농담이 이들로 하여금 자부심 있게 살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

1459년 명나라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배에 금바늘을 가득 실어 말라카 왕 술탄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이 바늘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내 권력 아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금바늘을 받은 술탄은 수많은 녹말 포대를 중국 왕에게 보냈고 ‘이 포대에 실린 녹말 알갱이 수가 내 권력을 상징한다.’라고 회신을 전달했다. 술탄의 지혜로움에 감동한 중국왕은 자신의 아름다운 딸과 시종 500명을 술탄에게 보냈다. 이들이 현지인과 결혼해 말라카 해협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최초의 페라나칸이라는 다른 민족의 일부로 말레이시아의 문화를 만들고 중국과 말레이시아의 합혼으로 독특한 문화를 뿌리내리게 했다. 어쨌거나 그들의 전통을 자랑하며 자존심을 세우고 살아가는 타민족과의 결혼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하였다.

박물관을 나와 멜라카 동쪽에 위치한 세인트 폴 언덕을 오른다. 힘에 부친 계단은 그래도 벗은 듯 신고 온 샌들이 힘든 계단을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햇볕은 따가운데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언덕 아래로는 붉은 개와 지붕을 이고 중국 건축물을 닮은 페라나칸(바바뇨냐) 집들이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평화와 불행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돌아서 바라보이는 부서진 붉은 벽돌 기둥이 뼈대만 드러내고 있었다. 최초에 이 건물은 말레이시아의 종교인 이슬람 교당이었고 타인의 명성 위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기라도 하듯 포르투칼은 교회당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때의 건축물은 흔적도 없고 깨진 벽돌기둥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보다 나는 종교를 떠나 한 세기마다 쫓아내고 쫓겨난 정변 속에 국가의 비애와 백성의 고난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정문인 듯한 벽돌 입구에 들어서자 감미로운 기타 반주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들어서니 40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귀에 익은 베사메무초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벗어 놓은 모자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아리랑을 아느냐고 물으며 모자에 큰돈을 넣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곡진하게 아리랑을 연주해주었다. 뺏고 빼앗긴 말레이시아의 역사 때문일까. 이곳에서 듣는 아리랑이 슬프게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수필공원》으로 등단.

수필집 《한 장의 흑백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