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론|

 

변화와 수용

 

 

                                                                                  염정임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던 겨울을 보낸 탓일까? 2010년 봄호에는 원로, 중진에 이르기까지 기량이 뛰어난 글들이 많이 실려 백화난만한 꽃밭을 보듯 다채로웠다.

문우회 회원들의 글들은 물론 외부 원로들의 글들에도 인생의 경륜이 무르익은 짙은 문향을 느낄 수 있었다. 프리즘에 투사된 빛이 반사되면서 오색의 무늬를 이루듯이, 일상사의 소소한 사건이 수필로 형상화된 글들이 영롱하다.  

수필은 자기의 고백이며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은 기본이다. 그것은 수필의 장점이면서 함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필가들은 매일 매일의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자기를 재료로 삼으려다 보니 벽에 부딪히기 일쑤이다. 수필에서의 3인칭 도입에 대한 시도도 이러한 소재의 벽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였음을 알고 있다. 그 시도가 조용히 확산되는 징후가 보인다. 40여 편의 작품 가운데 ‘나’ 대신 ‘그’로 시작하는 글이 두 편이 있다. 남기수의 〈가라산정까지〉와 최병호의 〈발바닥 닦기〉이다.

 

남기수의 〈가라산정까지〉

가라산정까지의 산행의 일정을 동기, 열림-인상, 솔숲, 풀밭, 나신의 군상…등 소제목을 정하여 자칫 지루하기 쉬운 산행의 일정을 나누었다.    

불현듯 주변에서 낯설고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이 느낀다. 그는 일어나서 산잔등 쪽으로 난 길을 빠르게 잡아든다. 밝은 데로 나오니 빛과 온기에 온몸이 그렇게 빨려들 수가 없었다.  

 

 가라산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명상적인 그의 문장 곳곳에 빛에 대한 이미지가 보인다. ‘그’는 빛을 따라 가고 있다. 이 작가의 숨겨진 자아는 빛이 표상하는, 보다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추구함이 드러난다. 가라산정까지의 등반은 높은 곳을 향하는 그의 정신적인 상승을 내포하고 있다.‘산정은 하나의 점일 뿐, 오르던 열정은 올라서면 다음 점을 향하여 이미 떠나고 없다.’

사람들에 대한 생각, 이어서, 산다는 것-대부분 본능을 좇는다. 따라서 사람들 그 아래에 흐르고 있는 자연성은 같다는 것, 이러한 생각들이 그의 하루 과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래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 자신의 내면이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데에 놀란다.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해 놀라고 자신이 낯설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자신을 분리하여 객관화 할 수 있게 된다. ‘모숨모숨’은 독창적 의태어이고, 진녹색 만-청포묵은 빼어난 비유이다.

 

최병호의 〈발바닥 닦기〉

왼쪽 엄지발가락이 오른발 접힌 쪽에 살짝 끼워지는 형태로 참선의 흉내로 가볍게 눈을 감는다. 발바닥과 방바닥과 지심이 하나로 이어진다. 이윽고 몸이 흔들린다. 그런 반수의 휴식을 하염없이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눈을 떠 보니 오른발 바닥이 그의 눈을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발바닥은 그의 내면에 자리잡은 자의식이며 그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를 응시하는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그 이후 그의 청소하기는 발바닥 닦기의 일환이 된다. 발바닥에 티끌이 묻어 있는 예보에 따라 그는 청소의 일정을 잡는다. 그에게 집안의 청소는 자기 자신의 고해성사이며 발바닥은 그 성찰의 바로메타가 되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삼인칭이 화자가 되어 있다. ‘그’는 작가의 내면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자아이다. 김현은 이를 ‘현실적 자아’와 ‘상상적 자아’로 분리시키고 있다.

‘그’가 화자가 되었을 때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문학적 효용은 어디에 있을까?  일인칭인 ‘나’로 전개되는 수필에서 독자의 정서에 밀착하여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가 화자가 될 때에 그 공감의 질량이 어떻게 변할지 모든 수필가들이 더 고민해야 되리라고 본다.

전통적인 수필에서 화자는 관조자라는 동양적인 개념이 우세했다. 3인칭 수필에서는 상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어떻게 길항하며 또 화해하는지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심층적으로 자신을 탐구하고 분석함으로써 수필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3D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특수한 안경을 쓰고 보면 영화화면이 입체로 보이는 것이다. 얼마 안 있어 TV도 입체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확실히 입체 영화는 보는 재미를 더해 준다. 화면이 생동감이 있고, 더 사실적으로 보이며 실감이 난다. 관람자가 화면에 들어간 듯한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과학과 테크놀리지는 점점 발달하고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욕구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양식을 요구하고 있다.

문학도 보다 다양한 형식과 실험을 통해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수필도 입체적인 구도를 가질 때에 독자에게 더욱 어필한다.  

김녹희의 〈골목안 풍경〉과 윤삼만의 〈멧돼지의 항변〉은 입체적인 구도로 성공한 수필이다.

김녹희의 〈골목안 풍경〉은 자기 자신을 그 풍경 안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액자 수필의 액자를 완성하고 있다. 그가 걷는 골목길은 현재이면서 과거의 어떤 시점을 연상하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의 골목길 여행은 시간 여행이기도 하다. 예비 신랑 신부를 보며 자신의 신혼 시절을 떠올리고, 화랑 앞에서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화가 친구를 떠올리며 기억을 반추한다.

 

 나는 아스팔트 위의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쓸쓸해진다. 문신처럼 박혀 있는 저들도 햇볕에 바래고 비바람에 쓸려 결국은 사라지겠지…. 누군가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도무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하게 흐려지는 것처럼.

 

…… 지나온 골목을 되돌아본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들어온다. 나무는 옷을 다 벗었기에 나무줄기와 휘어진 가지가 만든 멋진 조형미를 보여준다. 삭풍 속에서 오히려 의연한 기품이 감돈다. 바람에 쌓인 나뭇잎들은 차가운 땅을 폭신하게 덮어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나는 이 모든 풍경 속에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천천히 골목길을 걷는다.  

 

자칫 감상에 빠지기 쉬운 순간에, 그는 자신도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단아한 풍경화를 완성하고 있다. 정감 있는 문체로 울림이 있는 글이다.

〈멧돼지의 항변〉은 문명 비평적인 수필이다. 자연에 가해지는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고발이다.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환경에 대한 인식이 커가는 이즈음에 시의적절한 주제이다. 자칫 교훈적이 될 수도 있는 소재이지만, 우화를 삽입함으로  입체감을 얻고 있다. 수필에 상상력을 사용하여 그 평면성을 극복한 경우이다.

 

 멧돼지가 인간을 보면서 하는 넋두리….

 

 멧돼지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따뜻한 언덕에 모여든다. 대여섯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해바라기를 하면서 사람들을 성토한다. 우두머리쯤 되는 큰 멧돼지는 우리가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우리 식량을 자기들이 다 주워가 놓곤 우리더러 무엇을 먹으란 말인가.”

 

이렇게 항변한다. 풍자적인 수필로 성공하고 있다.

서숙의 〈청어의 꿈〉은 어떤 질료가 작가의 상상력과 섬세한 언어를 통해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헤링본의 빗살무늬에서 청어의 꿈을 유추해낸 그 감수성이 날카롭다. 청어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는 자신을 희생시키는 사랑의 은유이다. 결국 이 작가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며, 이 작품의 명징한 주제이다.    

유유히 활주하던 자유와 평화의 꿈, 멀리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난 자취, 지심한 바다에서 수면으로 올라 드넓은 하늘로 솟구치던 비약, 우주를 품었다. 이러한 청어의 미덕은 낱낱이 인류에게 공헌한다.

 

……모든 섞일 수 없는 것들이 경계를 부수고 드디어 스며드니 정화되고 승화하여 순결한 모습을 이룬다. 오묘한 조화의 한가운데 초월의 경지를 체현한다.

 

서숙은 청어- 기름-비누로 변용되는 과정을 밀도 있는 언어로 화려한 이미지의 교직을 보여준다. 소재에 대한 끝없는 천착으로 그는 사물에 숨어 있는 비밀 지도를 해독한다. 그는 청어를 매체로 사랑에 대한 송가를 부르고 있다. 그 사랑은 “이질적인 존재들의 팽팽하게 긴장한 표면장력을 줄여 서로를 섞게 해주는” 대승적인 사랑에서 “온전한 합일이다. 마지막 한 방울이 터지고 말면 축제의 끝, 드디어 나른한 평화가 향내로 남는다.”는 에로스적 사랑에까지 아우른다.   

다시 청어는 재생과 회귀의 바다로 돌아온다. 화려한 판타지 영화의 화면을 보는 듯, 서숙의 언어는 눈부시다.

최근 들어 수필지가 많이 발간되고 수필가들이 봇물이 터지듯이 양산되고 있다. 간혹 참신하고 좋은 글도 있지만, 대부분이 진부한 소재와 평이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감동을 얻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형식의 수필에 대한 욕구에 편승하여, 생활 수기, 자신의 한풀이, 정제되지 않은 낙서 같은 글이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기도 한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영감 속에서 오랫동안 발효되어야 하며, 문장으로 형상화한 뒤에는 많은 퇴고를 거쳐야 한다.

한 작가에게 개성이나 스타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작가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수필세계가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며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흔들어도 보고 새로운 모색도 해보면서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양한 양식의 수필의 흐름에 대해 그 변화를 수용하면서 수필이 보다 매혹적인 산문 미학으로 계승되기를 바란다.

 

 

수필공원(현 에세이 문학)과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에세이스트 상,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저서 :  《미움으로 흘리는 눈물은 없다》 , 《유년의 마을》, 수필선집 《회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