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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봉투

 

 

                                                                                      이순형

오늘은 월급날이다. 나만이라도 한 달의 수고를 통장에 넣지 말고 봉투에 담아 속주머니에 넣어 가보고 싶지만 은행 걸음 시킨다고 마누라에게 한 말씀 들을 것 같은 기분에 호기를 부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 어린 날 아버지의 월급봉투는 언제나 누런색이었다. 한 잔 걸쳐 불그레해진 얼굴로 어머니께 봉투를 내미는 모습은 평소의 모습보다 당당했다. 무뚝뚝한 성격의 어머니지만 그때만은 환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공손하게 봉투를 받았다. 그런 다음날이면 밥상에 생선도 올라오고 도시락에 계란부침도 들어가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월급을 쪼개고 또 쪼개 한 달 살림을 꾸리셨다. 쥐꼬리만하다는 봉급을 도깨비방망이처럼 재주를 부려 맏형의 대학 등록금도 마련해내셨고, 다음달 월급봉투에 희망을 걸며 한 달을 또 조바심치며 살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불평이 없으셨다. 작은 회사에 다니던 누나도 월급날이면 새 돈을 세면서 이것저것 궁리가 많았다. 용돈을 기대하며 어깨너머 슬쩍 보니 봉투에 인쇄된 명세서에는 무슨 칸이 많았고 깨알만한 글씨가 가득했다. 누나는 뭐가 이렇게 공제하는 게 많으냐고 투덜대면서도 기쁜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내가 취직하여 첫 월급을 타던 날, 월급날 아버지와 누나의 표정을 기억해내면서 출근길 발걸음은 날개를 달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시간까지 너무 길고 지루하여 자꾸만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늦은 오후, 드디어 경리과 여직원이 월급봉투를 나누어주자 ‘땀 흘려 번 내 돈’이라는 느낌에 가슴이 뭉클했다. 고참 사원들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신나게 돈을 세지만 나는 왠지 부끄러워 얼른 속주머니에 찔러넣고 시내버스에 올랐다. 혹시 소매치기라도 있을까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면서 가슴 근처를 지긋이 눌러가며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 어머니에게 내놓자 “네가 번 돈인데 뭘 내게 주느냐?”라고 하시면서도 환하게 웃으셨다. 그 순간, 어머니의 주름살은 봉투 속의 빳빳한 돈처럼 펴지는 듯 보였다. 그때 흐뭇했던 내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모든 업무를 컴퓨터로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명세서만 든 월급봉투가 달랑 책상 위에 놓여졌다. 돈은 고스란히 온라인으로 통장에 들어가 아내의 몫이 되는 순간, 한 달 동안의 땀과 눈물, 성취감과 한숨이 비빔밥처럼 담긴 나만의 밥그릇을 단번에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의 유혹과 독촉하는 외상값의 정글을 뚫고 무사히 돌아가 아내에게 봉투를 내밀면, 고마워하며 웃는 표정에 자신감을 얻고 다시 한 달을 살았는데 그 행복을 은행에 강탈당한 것이다. 이 날 하루만이라도 남자들의 어깨가 독수리날개처럼 활짝 펴지는 것을 이 숨 가쁘게 바뀌는 세상은 봐주질 않는 모양이다. 아내에게 꼬박꼬박 타서 쓰게 되는 용돈은 또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가?  

사업을 시작하고 몇 해가 지난 어느 월급날, 나는 큰마음을 먹고 은행에서 냄새가 상큼한 새 돈을 찾아 누런 봉투에 넣었다. 일부러 직원들을 하나씩 불러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현금으로 주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날 나는 중년 남자들을 이끌고 그들의 권위와 잃어버린 영토를 찾겠다고 쳐들어가는 장수라도 된 기분으로 우쭐댔다.  

이튿날, 자신감에 벅찬 직원들 표정을 기대했지만 이상스레 별 내색이 없었다. 속주머니에서 보검처럼 월급봉투를 꺼내줄 때 아내들이 어떤 모습으로 받았는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박 부장을 몰래 불러 집사람의 반응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는 꽤나 미안한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당신 회사 사장은 이조시대 때 사람이냐?”는 말만 들었다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번엔 김 과장을 불렀다. 그는 아내에게 봉투를 주었더니, “내일 은행을 다시 가란 말이냐?”고 투덜대며 식탁에 던지더라고 했다. 아니 남편의 신성한 수고비를 던지다니 싶어 불쑥 화가 났지만 꾹 참고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가뜩이나 금융회사 과장인 아내보다 월급이 훨씬 적어 주눅들어 사는데, 아내가 불편하게 현금을 주었다며 투덜거리니 할 말이 없더라고 했다. 남편 월급을 올려달라고 압박하는 수단도 가지가지구나 싶으면서, 한편으론 창피하기도 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설마 경리 여직원까지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현금을 찾아오는 것은 날치기 위험이 있고 불편하다.”며 그냥 종전대로 하자고 당당하게 고개를 세웠다. 완전한 착각. 이제 내 얼굴은 대낮부터 술 취한 사람이 되어버렸고 아버지들의 행복을 되찾으려던 꿈도 비틀거렸다. 컴퓨터시대에 장수의 청룡도는 이미 용광로에서 녹았는데, 나만 혼자 꿈속을 헛손질하며 헤매었던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에게마저 아버지는 그저 돈이나 벌어오는 사람이고, 모든 결정권은 어머니 손에 달려버린 시대가 되었다. 신용카드를 쓰니 돈 셀 일이 없고, 자동이체하고 나면 빈 통장이 된다. 그나마도 아내의 핸드백 속에 있으니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기도 어렵다. 생각해보니 뭉칫돈은 구경해본 지 꽤 오래다. 만져본 일도 없는 내 삶의 실체가 머릿속에만 있는 숫자가 되어 가상의 세계를 맴돌 뿐이다. 친구들도 대개 나와 비슷한 처지를 면치 못하는 것 같고, 디지털시대의 젊은 가장들은 아예 그런 개념조차 없는 듯하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변한다고 하지만 더러는 그냥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이 지나쳤던 것일까.

오늘은 주머니에 돈이 없는 월급날이다. 아버지가 그립다.

거리엔 어느새 어스름이 몰려든다. 집 앞 포장마차에 들러 힘겨웠던 한 달을 돌아보니, 신입사원 시절 동전까지 알뜰하게 담긴 두툼한 봉투를 받던 기억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혼자 마신 대포 한 잔에 어느새 취기가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