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이동렬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라는 나의 일곱 번째인가 여덟 번째 수상집 출판 기념을 준비할 때였다. 이 사람은 꼭 초청명단에 넣어야 하고 저 사람은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된다며 자꾸만 보태다 보니 그 수가 엄청 많아졌다.

이런 일을 당해서는 실제로 참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출판 기념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행사 일주일 전쯤 전화로 참석여부를 물었다. 대부분이 ‘참석’ 아니면 ‘불참석’을 알리는 대답이 금방 나왔다.

그런데 “글쎄요.”나 “가도록 해봐야지요.”하는 대답이 나올 때가 꽤 있었다. 오겠다는 말인지 못 오겠다는 말인지 참으로 아리송한 대답. 이렇게 대답한 사람이 출판기념 자리에 참석을 하면 나는 반가워서 “아이고 왔네.”하고 손을 내밀면 “내가 언제 안 온다고 했나?”하고, 참석을 하지 않은 사람을 나중에 만나서 “그날 왜 안 왔수?”하면 “내가 언제 간다고 했나?”하고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영어식 표현을 하자면 이쪽으로 뛰어내려도 되고 저쪽으로 뛰어내려도 되는 기회주의적인(fence sitter)대답, 애를 먹는 사람은 행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공식적으로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참석하느냐, 아니냐.”같은 질문에 “글쎄요.”, “가도록 해봐야지요.”같은 미적지근한 대답은 캐나다나 미국 같은 북미대륙에서보다는 한국에서 훨씬 더 자주 눈에 띄는 현상.

왜 그럴까?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답변은 의외로 뿌리가 깊은 우리의 사고방식 때문인 것 같다. 동양 사람들은 모순이 되는 주장들은 타협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변증법적 사고를 선호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동양식 생각으로는 우주는 정靜적이 아니고 동動적이고 변화 가능한 곳. 현실은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에 그 현실을 묘사하는 개념들도 고정적이고 객관적이기보다는 유동적이고 주관적이다.

이렇게 끝없이 변하는 세계에서는 신-구, 장-단, 선-악, 강-약 등의 대립이나 역설, 불규칙은 항상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대립은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양극을 대표하는 두 주장들이 조화롭게 존재하며, 대립구도를 이루지만 서로 연결되어 상호 통제를 한다. 그러니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거나, “이긴 것이 진 것이요, 진 것이 이긴 것이다.” 따위의 선문답 같은 모순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어떤 사물도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한 가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 그 반대쪽에 있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긴 것은 곧 짧은 것이요, 선과 악은 서로 공헌하는 것이니 선을 알기 위해서는 악도 알아야 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식의 사고방식을, 동양 사람들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and/both]’식의 모순을 내포하는 사고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회심리학자 니스벳(R. Nisbett)이 보고한 속담 연구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 “다수에 대항하는 소수는 반드시 패한다.”, “예를 드는 것 자체로는 증거가 될 수 없다.”같은 모순을 내포하지 않는 속담과 ⓑ “지나친 겸손은 절반의 교만함이다.”, “적보다는 친구를 조심하라.”같은 모순을 내포한 속담(겸손함은 원래 교만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친구들은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니 모순을 내포한다.)을 제시해 주고 그 속담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를 평가하게 했다. 결과는 미국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모순을 내포하지 않는 속담을 더 선호하는 반면, 중국 학생들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속담들을 선호했다.

출판기념 행사 하나를 놓고 말이 길어졌다. 좌우간 “참석하도록 해봐야지요.”하고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면 참석했더라면 자리를 빛낼 다른 몇 사람도 못 오게 되고, 오지도 않는 사람 음식 값을 내느라 행사는 적자로 끝나기가 십중팔구다. 그런데 가만있자, “글쎄요.”나 “참석하도록 해봐야지요.”하는 말 속에는 ‘네’도 들어가고 ‘아니오’도 들어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류類의 대답은 곧 동양사상의 핵심인 중용中庸, 즉 반대되는 두 명제 사이에서 중도를 모색하는 가장 ‘이상적’인 대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흐리멍덩한 기회주의적인 대답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Notre Dame University, University of West Ontario 교수 역임.

 저서 《그리움은 산국화 되어》, 《꽃피고 세월 가면》,  《남의 땅에서 키운 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