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자찬

 

                                                                                오세윤

창원蒼園 이영복 화백의 개인전이 과천 가원 미술관에서 열렸던 때의 일. 첫날에 이어 전시회 마지막 날, 마감시간인 3시에 임박해 다시 전시관을 찾았다. 20호 크기의 그림 한 점이 닷새 내내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마음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홀 입구에서 마감준비를 하던 부인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손님이 이미 끊긴 텅 빈 홀에서 창원 혼자 예의 그림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곁에 다가서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창원이 불쑥 말했다.

“이 그림 참 좋지?”

딱히 나의 동의를 구하는 품새도 아니었다. 스스로 취하여 스스로에게 하는 감탄조의 억양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중에도 창원의 눈은 여전히 그림에 붙박여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눈을 떼어 이미 익숙해진 그림을 다시 바라다보았다.

옆으로 누워 뻗은 청솔 한 가지, 나무랄 데 없는 그림이었다. 3년 전 인사동 전시회 때 이미 한 차례 보았던 작품이었다. 구도의 깔밋함, 여백의 담박함, 그 앞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청청한 기상. 홀로 고고하여 속을 떠났으면서도 보는 이를 내치지 않는 너그러움이 있었다.   

그때도 보는 순간 마음을 온통 빼앗겨 창원에게 곧장 구입 의사를 밝혔었다. 하지만 이 화백은 소장품이라는 말만으로 가격도 밝히지 않는 채 나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냥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내걸었을 뿐이라며 어정거리는 나를 한사코 다른 그림 앞으로 유도했다.

전시회에 다시 나온 그림을 보자 욕심이 불같이 타올랐다. 개회식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그에게 구입 의사를 밝혔지만 이번에도 전번과 같은 대답으로 창원은 애매하게 웃기만 했었다. 친구지간에 가격흥정하기가 껄끄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예술가라해도 그림이 생활수단이 되는 이상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의도에서인지 도통 속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학 시절부터 사귀어온 창원은 성품이 그렇듯 이악하지도 않았고 얄팍한 처세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전시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연달아 전화상으로 조르는 나에게 창원은 그냥 보관할 물건이라며 완곡하게 거절하기만 했었다.

“날 주게.”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말했다. 웃짐 부풀게 내뱉는 나의 격한 어조에 충격을 받은 걸까. 잠시 숨마저 멈추고 미동도 없이 섰던 그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지.”  

부인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커피숍에 앉아 창원이 그림에 얽힌 자기심경을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소나무에 미쳐 30여 년을 국내외 곳곳을 헤매 다니며 그려온 중에도 이 그림만큼 흡족한 작품은 얻지 못했노라고. 100호 200호의 대작도, 그리고 중국 황산의 소나무도 그렸지만 10여 년 전 충주 단호사 경내에서 새벽 기운에 얻은 이 〈와송臥松〉처럼 애착 가는 그림은 없노라고 했다. 남에게 내보이기조차 아까워 혼자 지니고 있던 것을 3년 전 인사동전시회에서 처음 내보인 거라고,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당시의 전시회에서도 많은 사람이 탐을 냈지만 모두 거절했노라고 창원이 조근 조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부연하여 부탁을 했다. 앞으로 자기의 전시회가 있을 때는 꼭 빌려줬으면 좋겠다고, 전시회 한쪽에 걸어놓고 그 기간만이라도 보며 지냈으면 한다고, 그런 조건이라야 양도하겠다고 했다.

자기 작품에 자기가 취하는 화백, 자화자찬이 지나치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그림을 앞에 두고 나는 진정한 소유란 어떤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혼신을 다하여 영감으로 그렸다 해서 저 그림이 창원의 것일까. 구하여 거실에 걸어 놓는다 해서 나의 그림이 될까. 불후의 작품이란 일반적인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마치 만 사람이 만 번을 오르내려도 산은 여전히 산 자체로 변함이 없는 것처럼….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고 자화자찬을 서슴지 않는 창원을 바라보면서 나는 지난번 나의 글에 얽혔던 해프닝을 연비연비 떠올렸다.

몸담고 있는 《에세이플러스》가 《한국산문》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기왕의 ‘명 수필 코너’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됐다. 차제에 새로이 인원을 보강하고 널리 신간을 구해 읽으며 심도 있게 합평하는 등 내실을 기했다.

그 두 번째 달, 팀원 중 한 분이 내 글 <난향>을 추천했다.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자신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자신의 글을 어떻게 ‘명 수필’입네 올리느냐고, 그런 후안무치는 저지를 수 없노라 재삼 고사했다. 하지만 그분은 마침 검토할 신간이 없다는 구차한 핑계를 앞세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 또한 한목소리로 합세하여 어마지두 <난향>이 ‘명 수필 난’에 오르게 됐다. 책을 받아든 독자들이 무어라 할까.

재수록되고 나서 다시 읽어보는 나의 글, 만족은 하면서도 창원의 저 솔 그림처럼 혼이 담기고 기품이 서슬 푸르다고는 감히 장담을 못한다.

수필을 써 온 지 어느 사이 8년, 이를 계기로 앞으로 두어 편이나마 자화자찬해도 좋을 보다 참된 글을 쓰게 되었으면 하는 자욕恣慾으로 그림 앞에 선다.      

 

 

 《시와 산문》 으로 등단. 소아과전문의 개원 은퇴.

수필집 《바람도 덜어내고》 , 《은빛 갈겨니》 등 《에세이플러스》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