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의 집

 

                                                                                이순희

어디를 ‘간다.’라는 동사 앞에서 나는 곧잘 설렌다. 걷는다는 동작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해주기 때문일까.

걷지 못하는 삶은 절망이요 죽음과 같다. 삶의 질이 파괴되는 첫 단추이고 비극이다. 그래서 나는 32년의 대학생활을 접고 시간과 여유가 좀 생겼을 때, 덧없는 일상에 나의 노년을 온전히 맡겨버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65세 퇴직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에의 항해이며 새 출발이고 도전이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 이후 수많은 곳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녔고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느낌을 향하여 늘 걸으려고 애썼다.

이번 노르웨이 여행은 오슬로에서 비행기를 두 시간 이상 타고 북위 70도 선상에 있는 크루즈의 거점인 키르케네스 항에서 34개의 항구를 거쳐 남쪽 베르겐까지 내려가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훗티르텐의 선박 편을 이용하기로 했다. 뭉크, 비겔렌, 입센, 난센 그리고 아문센 이런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가고 싶고 보고 싶고 머물며 느끼고 싶었던 젊은 시절 꿈의 땅이다.

키르케네스는 3,300여 명이 사는 작은 항구도시인데 동남쪽 7킬로미터를 달리면 러시아 국경과 접해 있고, 서로 37킬로미터 지점에는 핀란드가 받히고 있다. 8월 중순인데도 모자를 눌러쓰고 겨울 코트를 입어야했다. 작은 도시이지만 20여 분 거리에 비행장이 있고 15분 정도 거리에 대형 선박이 자주 드나드는 부두가 있다. 바이킹 시대를 시작으로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가 되었다가 다시 노르웨이로, 2차 대전 중에는 독일이 점령하기도 했던 파란만장한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던 땅이다. 도시풍경이나 사람 사는 모습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 가 할 정도로 조용하다. 철조망 하나로 러시아와 국경이 표시된 어느 교외로 안내되었다. 국경이라고는 하지만 지키는 사람 하나 없고 허름한 막사하나도 없는 허허롭게 펼쳐진 자연의 맨얼굴 그 자체였다. 뎅그러니 표지판 하나가 “러시아 쪽을 향해 소변보는 것을 금지한다.” 라고만 쓰여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부두로 갔다. 크루즈 선박치고는 350명을 태울 수 있는 작은 종류의 것이었다. 선박 내 손님들의 품격이라든지 식당, 휴게실 분위기는 라틴 문화에 익숙한 나에게는 심심할 정도로 점잖았다. 작은 도서실이 있을 뿐이고 모두 책을 읽거나 갑판 위를 산책하고 도란도란 담화를 즐기거나 선탠을 하는 정도였다. 식사는 내가 경험한 어떤 선상에서보다 질이 좋았다. 러시아 산 큰 게는 내가 어릴 때 먹어 본 영덕대게 같은 맛이었다.

노르웨이의 자연은 빙하지대와 피요르드가 엮어내는 비경과 함께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압권이었다. 그 풍광 앞에 서게 되면 행복한 충격을 받게 된다. 높낮이, 크기, 색깔, 소리, 모양새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이렇게 많은 다른 것이 모여 하나의 조화를 이룰 때 그 경이로움이란! 서로 다른 생각, 종교, 피부색, 언어, 다른 음식 등이 없는 세상은 가장 메마르고 질이 낮은 인간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항구마다 하선하지 않았다. 단지 관광객을 위한 유람선이 아니라 연안 곳곳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교통수단이고, 모든 생활필수품을 나르는 역할이 기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배는 200명 정도 사는 작은 항구도 거쳐 간다. 어떤 연안에서는 그림 같은 집 한 채가 있기도, 혹은 두 채가 있기도 하다. 그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려면 집에 매어 둔 작은 보트 같은배를 이용하여 가까운 항구까지 나와 다시 연락선을 타고 나가 쇼핑도 하고 일을 보기도 한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어장이 있다는 보트 피요르드를 거쳐 드디어 북극권의 하이라이트인 북위 71도 10분의 노르카프에 가기 위해 호닝그스보그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계곡과 산길을 37킬로미터나 굽이굽이 돌았다. 그런데 길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루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몇 번이고 우리가 탄 버스가 멈추기도 하고 서행을 해야 했다. 차 속에서는 카메라 셔터소리만 들렸다.

노르카프는 좀 어둡고 칙칙한 색의 암반으로 이루어졌다. 바다만 보이는 휴식처 건물 앞에는 덩그러니 지구본 하나를 제작해 올려놓았다. 이 곳 평평한 땅 자락 끝에서는 갑자기 307미터 수직으로 떨어지는 절벽이 보인다. 이 낭떠러지에 패어진 골들은 수억 년 풍상을 겪었으나 별 일 없었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으로, 오로라가 나타나는 것도 백야가 이어지는 것도 아는 듯 모르는 듯 두꺼운 침묵만이 깔려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서는 바다에 마음을 맡겨버리고 지나가는 바람을 잠시 불러 세워 같이 흥얼거리며 홀로 걸어보고 싶다. 스웨덴 국왕 오스칼 2세와 프랑스 루이 필립공의 방문의 흔적도 있는데 그 옛날 그 시대 지체 높은 그들은 여기서 나와 다른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워 갔을까?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이네 내 님이네,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고대하노라.”

작가 입센이 그의 시극 〈페르 귄트〉를 국민 음악가 그리그에게 작곡을 의뢰하여 이루어진 〈솔베이의 노래〉다.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 전설의 주인공이며 방랑과 모험, 성공과 실패, 시골 한 소녀의 순정을 저버리고 떠났던 사나이다. 그를 평생 동안 사랑하고 정절을 지키다 마침내 돌아온 탕아를 품에 안아주던 솔베이크. 서정성 물씬하고 호소력 있는 그 음률은 이곳 계곡의 물소리, 산울림, 숲 속의 새소리,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된 그 공간을 거침없이 산책하는 구름 떼들과 물새들, 이런 모든 것이 밑거름 되어 태어났다.

드디어 내 목적지인 문화 예술의 도시로 발전한 베르겐에 도착했을 때는 먹구름이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간간이 석양은 그 사이로 누런 황금햇살을 몇 줄기 뿌려주기도 했다. 호텔 방에 짐을 풀고는 어느 정인이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베르겐 보겐만의 부둣가로 서둘러 나갔다. 나는 이곳에서 전혀 이방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내가 자랐던 고향처럼 편안했음은 웬일일까.

이 항구의 갯내를 맡고 자라면서 가족 여름별장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권유로 세계적 작곡가로 성장한 소년 그리그가 날마다 다녔을 생가 스트란드가텐 152번지는 이제 평범한 상점가일 뿐이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가 다닌 초등학교가 있고, 감레 베르겐 민속촌의 전형적인 목조건물들을 모아둔 야외 박물관, 그 속에 자리한 소년 그리그 부모님이 한때 살았다는 고옥, 그리고 가까운 언덕배기에 놓인 〈솔베이의 노래〉의 산실이었다는 작은 집, 시내 소공원의 그의 동상, 극장 이런 그리그의 족적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디서 그가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그의 말년의 삶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가장 잘 정리해둔 곳은 42세 때부터 24년간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부인 니나와 지낸 베르겐에서 동남 방향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트롤드하우겐 집이다. 햇살 바른 작은 언덕배기에 앉혀 놓은 전원적인 아담한 2층 목조 건물. 일층은 거실과 서재, 그 안에 모아놓은 트로피, 훈장, 가방, 연주 여행 등에서 가져온 선물들 그리고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잘 정리되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집 밖에는 두 개의 조각이 있었다. 하나는 1950년에 소련의 한 조각가가 기증했다는 페르 귄트를 기다리는 흰 대리석상인 솔베이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집 입구에서 약 15미터 아래쪽에 있는 빨간 작곡실로 내려가는 초입에 세워둔 그리그의 동상이다. 7평 정도 될까 하는 그의 작곡실 안에서 내다보이는 노르도스반네 바다 안쪽 기슭은 영락없는 잔잔한 호수처럼 보인다. 주변의 나지막한 야산은 악상에 방해되는 소음을 다 막아주는 것 같다.

그의 초상과 악보가 들어 있는 하얀 머그잔 두 개를 기념으로 샀다. 마지막으로 그의 무덤이 있는 절벽을 보러 바다 기슭으로 내려갔다. 5, 6미터 가까이 해조 음률을 들으며 10여 미터 높이의 절벽에 두 예술가 내외가 잠들어 있었다.

 

 

프랑스 니스 거주. 부산대학교 불문학 명예교수.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