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이경은

어느 여의사가 18명이 넘는 다중인격을 가진 소녀를 치료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소녀의 내면에서 18명이 넘는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그들의 가슴에 맺힌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들 서로 손을 잡고 화해를 했다. 그렇게 그들을 모두 마음속에서 떠나보낸 뒤에야 소녀는 본연의 제 모습을 찾았다.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도 그 인상이 깊게 남아 있다. 나는 정신분석학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인격들이 그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 들어앉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괴롭혔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사랑받아야 할 가정에서 벌어지는 부모의 가학적인 폭력과 무신경, 열등의식으로 인한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도피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어린 시절에 겪은 치명적인 상처가 소녀의 인생을 악마의 무거운 그림자 속으로 밀어넣었다, 며 영화는 끝을 맺었다.

이런 경우야 좀 특별나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내면에 한두 개 정도는 서로 다른 모습이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인격체의 다른 모습을 ‘가면’이란 이름으로 부른다면, 나는 한창 예민한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이것을 많이 사용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즐겨했던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땐 그러는 게 편했다. 그 가면을 쓰고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아가면, 굳이 내 자신에 대해 설명을 하거나 열등감 비슷한 것으로 위축되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곤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내 모습의 겉만 보는 거야. 내 진정한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어. 그러니까 아무리 함부로 말해도 난 상처받지 않고 괴롭지도 않아.’ 하며 가면을 쓰고 세상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나를 세상에 드러내기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무조건 내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깊었던 것 같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상처받고 눈물 가득한 시절이었다.

그 만인萬人의 거리에서 돌아와 집에 들어가면 나는 가면을 벗었다. 하지만 사실 완전히 벗은 것은 아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나만의 방을 갖는 건 사치였고 가족은 언제나 너무 열린 공동체였다. 그래도 반쯤 벗고 나면 제법 홀가분했다. 맨얼굴과 맨발로 있다는 건 내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출입증 같았다. 나는 지금도 일단 집에 들어오면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을 다 제거하고 ‘맨…’ 상태로 있다. 그러면 온몸에서 하나의 막을 걷어내고 내 자신에게로 딱 밀착되는 기분이 든다. 그제야 제대로 된 나의 모습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나머지 반을 완전히 벗는 곳은 내 의식이다. 식구들이 다 나가고 혼자만의 공간에 서게 되면, 드디어 나는 숨을 쉰다. 아주 길게 푸욱 내쉰다. 그 의식의 공간에서 나는 무한 자유를 느끼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될 수도 있다. 남의 시선을 느낄 필요도, 남에게 시선을 줄 필요도 없다.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속으로 파고들거나 무방비 상태로 있다는 게 바로 편안한 안식처이다.

그 내밀한 나만의 공간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진짜 ‘나’를 불러낸다. 그리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들을 한다. 낮잠을 푹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며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거나, 쓸데없는 생각들을 잔뜩 질리도록 한다. 그러다 손가락이 근질거리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이 자판을 치는 일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만큼의 작은 희열이 있다. 나는 톡탁거리는 소리를 내는 낡고 오래된 구형 노트북 자판을 좋아하는데, 무엇보다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고 소리가 가벼워 내 의식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론 시의 운율처럼 제 나름의 자판 음악을 ‘차르르 톡톡…’ 하며 연주도 한다. 그런 속에서 두 손을 조몰락거려 만들어내는 창작물들은 맛있는 주먹밥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가면들을 쓰는 일이 더 잦아졌다. 이런 저런 일들을 맡아서 하다 보니, 또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에는 나이가 제법 들어가서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방어적이고 공격적인 가면은 아니다. 때로는 그 가면에 구멍이 숭숭 뚫릴 때도 있다. 감정을 자꾸 흘리게 된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 혼자 집에서 하던 짓들을 자꾸 하게 된다. 생각들을 대상화시키거나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한다. 뭘 그렇게 가리고 말고 하나 싶어진다. 이러니저러니 어차피 한 세상인데 하는 호탕한 생각마저 든다. 철이 드는지 나이를 먹어 맥이 빠진 건지…. 어쨌든 그 철옹성 같던 ‘가면’이 얇고 투명한 막으로 수시로 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전후의 허무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작품들을 쓴 미시마 유끼오는 《가면의 고백》에서 가면 뒤에 숨어 있지만 그 가면 자체가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며, 가면과 맨 낯을 구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성적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순수한 호기심이 파괴된 욕망으로 연결되는 불안을 그렸지만, 할복자살로 이른 나이에 세상의 손을 놓아버렸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속뜻을 헤아릴 기회를 얻지 못한 건 아닐까.

 

오늘, 나는 고운 가면 하나를 집어들었다. 화장대 앞의 화려한 화장품들 앞에서 십 분이 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도 지어 본다. 아직은 제법 볼만 하다고 생각하며 립스틱을 집어든다.

갑자기 한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어느 카페에 내가 앉아 있다. 그 앞에 앉은 이는 내 얼굴의 주름과 후줄근해진 중년 여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데, 나는 그들을 향해 이십대의 가면을 쓰고 웃고 있다. 어쩌다 젊은이들이라도 만나면 꽃다웠던 청춘 시절의 내 모습을 기억해내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서슴없이 행복해 한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시간을 다 지워버렸다고 천진난만하게 믿으면서….

거울 속의 내가 나를 쳐다본다.

싱긋 웃는 듯 눈물을 머금은 듯, 그 표정이 참으로 수상쩍다.

 

 

《계간수필》로 등단(98년).

저서 《내 안의 길》. 율목문학상 수상.

현재  과천문인협회장. 라디오 방송작가. 음악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