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63회|

 

장돈식의 〈소나무 운이〉

 

사       회 :  최순희

참석인원 :  14명

일       시 :  2010. 9. 18.

장       소 :  계간수필 사무실

 

<본문>

 

창문 너머 앞산을 바라본다. 다가서는 절벽 위에 한 그루 외로운 노송이 있다. 그윽한 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내 벗이다. 나무야 모두 다 사랑스럽지만, 그 중에서도 더 정감이 가는 나무가 있다. 바로 저 소나무다. 수령이 100년은 넘었고 200년은 안 되었을 것 같다. 천 년을 사는 소나무의 나이로는 아직 젊다.

저 소나무 껍질을 닮은 내 얼굴의 깊은 주름에는 살아온 세월만큼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아직 거동이 불편하진 않지만 사람의 수명으로는 황혼이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70여 년 대하다 보니 그나마도 정이 들었다. 이제는 그레고리 펙의 얼굴과 바꾸어준다 해도 마다할 것이다.

외진 곳에 산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저 나무와 좋아지낸다. 서로 바라보며 정을 나눈 지도 어언 6년이 된다. 내가 상심할 때 저 솔은 축 늘어져 시름하는 것처럼 보였고, 내게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면 제가 어찌 감을 잡았는지, 덩달아 가지가 우줄우줄하는 듯하다.

오래전 문단의 원로 임옥인 님의 초대를 받아 천호동 교외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은 적이 있다. 선생은 정원을 안내하며 “저것 보세요. 나무들이 나를 반겨 잎을 흔들잖아요. 아침에는 더 반가워 가지까지 너울거려요.” 하셨다. 감성 넉넉한 분의 과장된 느낌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에서야 선생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3년 전부터 솔잎혹파리가 끓더니 나무가 시름시름 생기를 잃고 잎이 불그스레 타들어갔다. 이제 100여 살, 아직 젊은 나이에 몹쓸 병을 얻어, 속리산 소나무처럼 죽나 보다 걱정했다. 산림과 직원들에게 간청해서 줄기에다 수간주사樹間注射를 하고, 그루 밑동에 구멍을 내고 약을 넣었다. 약석藥石의 효험이 있어 올봄부터 ‘운이雲伊’는 새순을 내고 푸르름을 되찾았다.

운이는 내가 붙여준 저 소나무의 이름이다. 훤칠하고 썩 잘생긴 나무는 아니지만, 생김새가 아담하고 단정해 여자다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말麗末에 솔이松伊라는 이름난 기생이 살았다. 시문詩文에 능해서,

 

솔이 솔이 하니 무슨 솔로 여기느냐

천 길 절벽에 낙락장송 내 귀로다

 

라는 시를 남길 정도로 고고한 성품의 여성으로 저 나무와 닮은 데가 있다. 솔이는 송도 사람이라서 솔이라 했다면, 여기는 백운산白雲山이라 운이가 걸맞는 이름 같았다. 여름날 새벽, 안개 너울을 벗고 푸른 자태를 보일 때에는 청운이靑雲伊요, 겨울철 흰 눈을 이고 섰을 적에는 백운이白雲伊다.

때는 조선조 말엽 어느 날, 개미의 날개 깃을 닮은 솔씨 한 알이 날려 하필이면 절벽 위 바위틈에 떨어졌다. 씩을 틔웠으나 씨젖을 다 먹고 난 후 뿌리내릴 흙이 없었다. 어린것이 기갈은 오죽했을까. 푸근한 흙에 자리 잡은 다른 솔싹들은 쑥쑥 잘도 커 가는데, 메마른 바위 틈새에서 모진 삶을 사느라 마디게 자랐을 것이다.

운이가 싹을 틔운 곳은 높은 벼랑 위인지라 자라는 동안 풍문으로 듣고 본 것이 많았을 것이다. 명성황후가 왜倭의 망나니들에게 시해된 것을 들었을 때가 서른 살이었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안 것이 마흔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독립을 하겠다며 부르짖는 만세 소리도 들었으리라.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20년, 황해가 바라다보이는 황해도의 어느 마을에서, 먼 훗날 자기와 벗이 될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 자라고 있는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이 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자지러지는 것도, 광복을 했다며 들떴던 우리나라가 동강난 일, 동포가 서로 싸우는 비극도 다 보아서 아는 운이다. 척박한 바위틈이라 나이테는 80~90년을 만들었을 터인데도 겨우 기둥 굵기가 됐을 무렵이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잘생기지 못한 나무는 쓸 곳이 없는 고로 오래 산다.”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저 나무는 연료가 귀하던 시절에는 나무꾼의 발이 미치지 못하는 벼랑에 섰기에 베임을 면했고, 영양이 부족해서 늠름하게 자리지 못해 건축용 벌채도 면했을 것이다. 이렇듯 운이는 다른 나무들이 싫어하는 곳에 뿌리내렸기에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는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지를 말하지 아니한다.

 

이양하 선생의 글 <나무>의 한 대목이다.

사람들 중에는 나무만큼이나 자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내가 만약 도시에 사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동기가 여덟이나 되는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모와 향토를 원망하거나 탓한 적은 없다.

아버지는 무애无涯 양주동 님과 보통학교 동문이었다 한다. 성적이 좋아서 도지사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반대로 학업을 중단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성취만을 생각했다면 양 선생만큼이나 대성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만약 그랬다면 나와는 관계없는 분이 되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나도 결혼 전 마음에 솔깃했던 여자들이 있었으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밥처럼, 숭늉처럼 수더분하게 50여 년을 나와 살았고, 우리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아주었다. 두 사위, 세 며느리와의 만남은 또 얼마나 소중하고 흐뭇한 사건인가. 저들은 또 끌끌한 손자, 예쁜 손녀 아홉을 선물했다. 늦게나마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잘한 일이다. 문우文友들과 사귀며 저들의 이름과 나란히 지면에 오를 수 있음은 살맛나는 일이다.

피난은 아픈 기억이지만 덕으로 삼는다. 이북의 미움을 사지 않았더라면 도망쳐나와 이남에서의 자유로운 삶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업이 잘돼서 제법 큰 돈을 가져본 것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둔다. 그러나 수성守成하지 못해 지금은 가진 게 없으나 나쁘지만은 않다. 이렇게 얽매임 없이 일신이 편함을 부자들은 모를 것이다.

소나무 밑에는 작은 식물들이 산다. 솔잎이 가늘어 햇빛이 새기 때문이다. 활엽수는 빛을 넓은 잎으로 탐욕스럽게 다 챙기니 다른 푸새가 배겨낼 수가 없다. 그 대신 천리天理는 공평해서 활엽수들이 잎새를 떨구는 계절에도 소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한다. 어수룩해서 제 몫 다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인생의 사계절 모두를 푸르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높은 지위와 깊은 학문, 큰 재산이 내 신변에 없는 것은 마치 저 가난한 소나무의 외로움과 견줄 수 있고, 척박한 바위 설렁이라 이수에 불을 옮겨줄 나무들이 없어 언저리를 핥은 몇 번의 산불에도 불타지 않은 것에도 비길 수 있으리라.

삶의 자취가 비슷한 저 운이가 벼랑 위에서 자적自適하는 것처럼 나도 지금의 처지가 좋다. 여기가 좋다. 운이가 오늘을 즐기는 것처럼, 나도 이 시대가 좋고 오늘이 좋다.

 

 

 

사회 : 지금부터 《계간수필》 제63회, 2011년 봄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자리를 함께해주신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조명할 작품은 〈소나무 운이〉입니다. 이 작품을 쓰신 작가는 김종완 선생의 말에 의하면 삶이 예술이셨던 분, 바로 장돈식 선생님입니다. 작가론은 강호형 선생님께서 수고해주시고, 작품론은 변해명 선생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그럼 먼저 강호형 선생님께 작가론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강호형 : 초우草友 장돈식은 1920년 6월 5일 황해도 장연에서 아버지 장한익과 어머니 오인환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증조부 장배환은 한학에 능한 전통 유교가문으로 근동 30리에 장씨네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재산가였다고 합니다. 제례의식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예수교에 발을 들여놓은 할머니 영향으로, 평양성경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근동에서 학식 높고 신앙심이 돈독한 이름난 선교사였는데, 장남인 장돈식은 이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어른들의 사랑도 극진해서 할머니는 두 돌이 될 때까지 잘 걷지도 못하던 장손 돈식을 데리고 모감면에 집을 얻어 기거를 하며 모감보통학교에 입학시키고 손수 보살폈다고 합니다. 모감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일본인 밑에서 공부시킬 수 없다는 아버지의 방침에 따라 진학을 포기하고 과수 농사를 지으며 강의록을 구해 독학을 했습니다. 때마침 해주 평양에서 일기 시작한 신앙운동의 영향을 받아 마경일 목사, 송정률 교수, 정경옥 신학 박사의 강의를 들으며 그들의 사상과 철학에 매료됩니다. 이때 이미 2,000권의 서책을 독파한 그는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속달면 우체국에 취업을 합니다.

1940년 만주로 가서 정경옥 교수가 있는 쓰핑지예(四平街)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가정교사 등, 고학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어 학업을 마치려고 북경으로 갔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귀국, 고향에 있는 관창보통학교 교사가 됩니다.

22세에 민용식과 결혼했습니다. 1950년 6·25 사변으로 월남, 인천에 가나안 농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33년 동안 양계, 양돈 등 선진농업기술을 보급하면서 농민들을 교육하여 자립심을 고취하는 농촌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3년 〈국민포장 산업장〉, 3·1 문화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도 장 선생의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1985년부터 수필동인 ‘모닥불’에서 활동을 하면서 문학에 입문해서 1990년 《한국수필》에 〈취하는 것이 술뿐이랴〉를 올려 등단을 합니다. 이후 창작수필문학회 회장, 한·중 우리 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자비로 한중韓中작가 합동수필집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부인의 병환으로 1988년부터 원주 치악산 기슭에 ‘백운산방’이란 집을 짓고 살다가 2009년 4월 10일 간암으로 영면했습니다.

저서로는 《언덕 위에 머문 향기》(1970), 《빈 산엔 노랑 꽃》(2001), 《딱새네 경사》(2008)가 있습니다.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빈 산엔 노랑 꽃》으로 현대 수필문학 대상을 받았습니다.

평론가 김종완은 “삶이 예술인 사람, 그가 바로 장돈식이다. 그는 음풍농월을 즐기는 풍류객이 아니고 책상머리에서만 이상을 펼치는 창백한 이론가가 아니다. 소박하나마 자기의 이념을 설계하고 실제로 그 세계를 자기가 속한 사회에 실현코자 행동한 운동가였고, 그것을 전하고자 외쳤던 교육자였다. 그는 몽상가가 아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누이동생이자 수필가인 장현심은 “오빠는 격동기에 태어나 힘든 세월을 살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도한 사람이다. 스승을 통해 신앙을 삶에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웠으며 평생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남들보다 앞선 생활방식, 한 걸음 뛰어넘는 사고思考,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만년 청년이라고 불렸지만 오해 또한 많이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들은 바로도 그는 남을 돕되 커피 자판기를 여러 대 사서 장사가 될 만한 곳에 놓아두고 고아원이나 양로원 사람들에게 관리를 맡겨 수익금을 거두게 하는 방법으로 남을 도왔습니다. 또 무, 배추를 많이 심어 가꾸어 놓고 김장철이면 와서 거두어 가게 하는 등 자립심을 고취시킴으로써 교육의 효과까지 거두는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겨울이면, 산짐승이며 새들이 먹을 사료를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가축처럼 돌보는 환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또 적지 않은 재산의 절반을 부인 명의로 이전하여 자율권을 양여하는 등 가정에서부터 평등주의를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인품 때문에 백운 산방에는 문인, 기독교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 도처에서 우리는 그의 이러한 사상과 인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면하기 이틀 전, 막내 누이 장현심에게 “잠깐이다.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사회 :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변해명 선생님께서 작품론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변해명 : 그의 수필 〈단장의 숲〉에서 보듯 그의 일상은 숲 속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 숲은 다시 그의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빌딩숲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슴에 산들바람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의 저서 《빈 산엔 노랑 꽃》이 그것입니다. 지난해 발간(학고재 산문선 13)되어 서점가에서 크게 주목받으며 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 반열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책입니다.

《빈 산엔 노랑 꽃》은 인생을 한 점 후회 없이 살아온 자의 여백을 수채화로 그린, 자연의 경이로움과 감동들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80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낸 첫 수필집이라면 대개 자서전쯤 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나의 친구들〉, 〈소나무 운이〉, 〈돌아오지 않는 꾀꼬리〉, 〈배짱이의 죽음〉, 〈털방거지의 행복〉, 〈산 속의 사람 산 밖의 사람〉 등 글 제목들에서 보듯 그의 지난 인생사나 늘어놓은 넋두리가 아닙니다. 조물주가 빚어놓은 자연의 신비로움에서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하는 성찰과 감동과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생이 자서전 하나 낼 만한 삶을 못 살아왔다는 뜻은 더욱 아니지요. 그가 혼신을 다했던 농업에서 65세에 그‘업’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삶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프로의 삶이었습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가나안 농원’의 설립자가 바로 그분입니다. 종축개량, 축사개량, 농촌계몽 운동 등으로 우리나라의 농업을 선진농업으로 한 차원 높여 놓았던 장본인이 바로 초우 선생이지요. 1950년에 농장 경영을 시작, 더불어 사는 삶을 주창하며 농촌운동에 일생을 바쳤던 선생이 은퇴 후 홀연히 돌아간 곳이 자연의 한 자락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거래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선생이 제2의 인생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글쓰기였고, 그 또한 성품대로 혼신의 열정을 다하였기에 튼실한 가지를 뻗어내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것입니다. 산짐승, 들짐승, 야생초에 이르기까지 관찰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해박한 지식은 미국 하버드대 출신 생물학자도 찬사를 아끼지 않은 스터디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국내 수필문단의 최고 영예를 자랑하는 ‘제8회 현대수필문학상 대상’까지 주어져 그의 말년을 더욱 풍요롭게 했습니다.

초우 선생의 산방 주위는 지금 온통 샛노란 생강나무 꽃에 포위당해 있을 것입니다. 이른 봄 메마른 산야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모두가 노란색이라고 선생이 들려주었었습니다. 생강나무가 그렇고, 민들레, 냉이 꽃이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대처보다 한 달쯤 봄이 늦게 오는 산방엔 아직 목련은 필 엄두도 못 내고, 생강나무 꽃의 뒤를 이으려는 산철쭉만이 봄바람 든 처녀 가슴마냥 소리 없이 저 혼자 부풀고 있을 것입니다.

사회 : 두 분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사회를 하는 즐거움이 작품을 선정하여 회장님의 결재를 얻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장돈식 선생님께서는 등단하기 전에 이미 작품집을 내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선생님의 여러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을 택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소나무 운이〉를 선택한 것은 대표작이기 이전에 토론의 여지가 많을 것 같아서입니다.

김영만 : 저는 장돈식 선생을 글 좋고 사람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활달하고 활동적인 분이셔서 옷도 늘 캐주얼하게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젊으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세가 높으신 분이었습니다. 수필 문우회에 들어오시고 싶어하셨는데 이 자리에서 뵙지 못하고 떠나가신 것이 안타깝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남기셨지요. 모 신문 문화면에 연재를 할 때 신문사 편집인에게 들으니 선생의 글이 아주 많이 읽혔다고 합니다. 수필의 맛을 본인이 먼저 아셨기에 독자들에게 그 맛을 보여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최병호 : 작품 선정을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장 선생은 자연을 알고 산을 아는 분이셔서 이심전심 하나가 된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소나무에 자기 일생을 두고 거기에 비유했지만, 수필에 있어 상상의 비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장자나 이양하 교수의 이야기를 덧붙인 것은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여름날 새벽, 안개 너울을 벗고 푸른 자태를 보일 때는 청운이靑雲伊요, 겨울철 흰 눈을 이고 섰을 적에는 백운이白雲伊다.’로 부치는 격조를 보여준 것은 침엽수와 활엽수의 공생을 천리로 본 것입니다. 이 작품은 자연 순리적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 이런 분이기에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97년도에 원주에서 안동 간인가요? 고속도로가 생기자 더 깊이 들어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병호 : 그때 벌써 요즘 각광을 받는 친환경적인 집을 짓고 사셨는데 나무색이나 흙색으로 산과 일치되는 색을 써서 집을 지으셨습니다.

김영만 : 사모님과는 따로 사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혹시 별거를 하셨던 가요?

강호형 : 별거라기보다는 그리 사시는 게 편해서 따로따로 사신다고 하시더군요. 재미난 것은 사모님께 가면서도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피차 편하게 지내야 한다는 얘기이지요. 또 흡연을 하는 아들을 위해 조그마한 방을 따로 마련해서 편하게 피우도록 한 것도 장 선생의 성품을 엿보게 하는 점입니다.

사회 : 사모님은 60에 면허를 따서 운전을 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두 분 다 청년같이 강건한 마음가짐으로 젊게 사신 것 같습니다.

정진권 : 읽고 난 다음에 장자의 얘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이 〈소나무 운이〉가 잘생겼으면 남대문을 다시 지을 재목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이 글의 전체가 남긴 인상은 욕심이 없고 다 고맙고 미워함이 없는 달관함을 느낍니다. 여기 나오는 이 시조는 원래 석 줄의 시조였습니다.‘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만 너기는다 / 천심절벽千尋絶壁의 낙락장송落落長松 니 긔로다 / 길 아래 초동樵童의 졉낫시야 거러 볼 줄이 이시랴’하는 석 줄의 시조이지요.한마디 덧붙인다면‘임옥인 님’보다는‘임옥인 선생’으로 썼으면 이 글의 분위기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김채은 : 신앙 얘기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족하며 사신 것은 신앙이거나 천성이거나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성이 긍정적이고 사람을 좋아 하는 분이셨습니다. 나이가 드셨어도 노인이라기보다는 젊은이 같았습니다. 특이한 분이고 참으로 만나기 쉽지 않은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글은 그야말로 많이 살고 나서 응축시킨 자서전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내의 이야기를 넣었는데 안 쓰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한 가지, 소나무 그늘에서는 나무들이 잘 자라지 않던데, 이런 예찬이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선화 : 격조 높게 잘 그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욕심을 더하자면 이양하 선생님의 글을 차용하지 않고 끝까지 장돈식 선생님의 목소리로만, 그 특유의 필치로 풀어갔다면 글의 완성도 면에서 더 좋았겠다는 인상입니다.

홍혜랑 : 저는 이 선생님을 뵌 적이 없어서 온전히 글로써만 알게 된 셈입니다. 소나무의 삶을 투영하면서 자족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나 마디가 있고 옹이가 있는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이 글의‘메마른 바위틈새에서 모진 삶을 사느라 마디게 자랐을 것이다.’라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전체적으로 볼 때 자연을 자족하는 삶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으며, 하필이면 소나무에 자신의 삶을 투영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장자를 얘기하셨는데 그것은 인생 후반의 겸손과 덕망을, 그리고 오랜 존경과 말년의 마음가짐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엄정식 : 저 역시도 글로만  뵙는 분입니다. 그런데 글보다는 사람이 더 좋은 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이지요. 저도 23년째  자주 시골에 가서 지냅니다만, 그곳에서 글쓰기에 적당한 소재를 찾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이 글만 보아서는 작품이 좀 산만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최소한 두세 번은 추고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글이 산만해 보이면 성품도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게 마지막 문장입니다. 좋다고 말씀 하신 분도 계시지만 반어법으로 비애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튼 ‘여기가 좋다…. 나도 이 시대가 좋고 오늘이 좋다.’라는 표현은 없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박영덕 : 장돈식 선생님의 작품에는 늘 자연의 경이로움과 감동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 걸로 기억됩니다. 더불어 사는 삶을 주창하며 농촌운동에 일생을 바쳤던 선생이 제2의 인생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글쓰기였고, 그 또한 성품대로 혼신의 열정을 다하셨기에 좋은 작품들을 남기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작품은 너무 많은 화소들이 동원되어 다소 산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통해 우리 가슴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성찰하게 하는 글입니다.

사회 : 토론이란 것이 참으로 재미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여러 차례 읽으면서도 산만하다는 것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토론의 묘미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 끝으로 회장님께 마무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봉진 : 우선 작품 자체가 제 취향은 아닙니다. 저는 어떤 글을 읽으면 사람을 보는데 장돈식 선생은 아주 당당하고 소탈한 사람이었습니다. 끝부분을 반어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어렵게 살아 온 것을 좋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살아온 삶 자체를 긍정한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강호형 선생이 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사회 : 선생님의 다른 작품을 보면 “저녁에 노을이 아름다우면 다음날이 쾌청하리라는 예고임을 경험으로 안다.”라고 하셨더군요. 모든 해석은 결국 독자의 몫입니다. 긴 시간 토론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김시헌 회원께서 이 작품에 대한 말씀을 서신으로 주셨기에 여기에 올립니다.

김시헌 : 수필문우회에 나가고 싶어도 건강문제와 밤길을 다니기 힘들어서 못 나가서 죄송합니다. 장돈식 님의 〈소나무 운이〉 잘 읽었습니다. 운이라는 이름도 좋고 내용이 친구 말하듯이 정을 느끼게 하는 좋은 수필이었습니다. 못 나가면서도 작품을 읽습니다. 문우회의 발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