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산문 ⑫

 

산사나무 울타리에 대하여

 

                                                                             A. G. 가드너

키 큰 너도밤나무 숲 속 별장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들어서자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잔잔한 기대에 설레고 있었다. 늦은 저녁이었다. 요즘 같은 여름밤이면 아주 차분하게 빛을 발하며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굽어보는 금성이 어느새 사라졌고, 달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낮보다도 밤에 더욱 강렬해지는 듯한 풍성한 향기들로 공기는 진했다. 시인 키츠는 이 여름 향기들을 우리의 상상 속에 영구히 새겨 놓았다.

 

발치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보이지 않고,

가지에 매달린 연한 향내도 알 수가 없네.

하지만 향기로 가득한 어둠 속에서 나는 짐작하네

철 따라 이맘때면 풀섶과 덤불과 야생 과일나무가

각기 무슨 향내를 풍기는지를.

산사나무와 …1)

 

그래, 그건 산사나무 향내였어.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한 보름 전 밤에 이 길을 올라오는데 별안간 내 앞에서 아름다운 정경이 확 펼쳐졌었지. 그건 별빛을 받아 번뜩이는 산사나무 꽃이었어. 나는 그곳을 알아. 여기만 지나면 되지. 높다란 생 울타리가 풀밭 오솔길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길가에 녹색 숲을 이루고 있었어. 이제 1, 2분이면 그곳에 이르러 그 황홀한 봄 경치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겠군.

그 현장에 도착하니 산사나무 꽃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숲은 남아 있었지만 그 영광은 어느새 시들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플리트 스트리트2)에서 보낸 두 주일이라는 시간이 그 숲에서 영광의 왕관을 앗아갔으므로, 올 한 해가 전시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모두 끝나고 나야 그 생 울타리가 홀연히 하얀 포말로 변하는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쉬지 않고 따라 오르고 있을 때 이전의 그 날아갈 듯하던 기분이 얼마쯤 가라앉고 말았다는 것을 나는 숨김없이 고백하겠다. 그곳에서 길은 본격적으로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긴 하루 동안 직장에서 일을 한 사람에게는 그 길이 힘들었고, 특히 가방이라도 하나 들고 있을 경우에는 피곤한 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데서도 내 기분이 가라앉게 된 원인의 얼마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기분에 그런 희미한 그림자를 내리게 한 진짜 원인은 사라진 산사나무 꽃이었다. 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험악한 세상에서 이런 부질없는 공상이나 하다니 한심한 센티멘털리스트가 아니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질없는 공상을 절실하게 만드는 것도 어쩌면 바로 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험악한 세상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물들의 덧없음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공상을 통해서일지 모른다. 자연의 순환 속에서는 나타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너무 경이롭게 뒤섞여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주는 환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미련보다 더 크냐를 두고 뭐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반갑다.”는 인사와 “잘 가라.”는 인사를 한꺼번에 해야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오늘 초원에서 뻐꾸기가 우는 것을 들었는데 어느새 그 울음소리의 두 번째 마디가 흔들리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둘째 마디는 완전히 잠잠해질 것이고 골짜기에서는 외마디 뻐꾹 소리만이 봄철이 끝났음을 알리는 조종처럼 울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건듯 지나가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가능하다면 붙잡아 두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뻐꾸기의 겹 외침이 영원히 여름 들판에 울려 퍼지게 하고, 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후에 검은지빠귀가 영원토록 감사의 피리를 불게 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수선화가 머리를 한들거리며 즐겁게 춤을 추는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 치고 그 춤이 너무 짧음을 슬퍼하며 불멸의 시를 쓴 헤릭3)의 기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수선화야, 그리도 서둘러 가버리다니

우리는 울고 싶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해가

아직 중천에도 이르지 않았으니

바쁜 하루 낮이

저녁기도 시간에

이를 때까지만

머물러 다오, 머물러 다오.

함께 기도를 올린 후에

우리도 너와 함께 가리라.

 

그렇다. 만약 헤릭이 살아 있다면 내가 산사나무 꽃에 대한 아쉬운 감정에 잠시 빠진 것을 용서해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내 심경을 이해했을 테니까. 독자 여러분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유식한 분들이라면 그의 시집을 펼치지 않고도 위 시의 두 번째 연을 기억해낼 수 있겠지만, 그 부분4)을 보면 헤릭이 내 심경을 이해했을 것임을 여러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항아리에 부침〉이라는 시를 쓰도록 영감을 준 것도 위 시의 경우와 똑같은 아름다움의 무상함에 대한 느낌이었다. 이 시에서는 목가적인 아름다움이 영원한 감격 속에 붙잡혀 있다.

 

아, 행복하고, 행복한 가지들이여! 너희는 잎을 떨어뜨리지 않고,

봄을 보내며 작별인사를 하는 일도 없구나.5)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 신기한 생명의 패러독스를 접하게 된다. 우리는 건듯 비쳤다 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붙잡아 두고 싶어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잡지 않으려고 한다. 영원히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나무라든가 작별인사를 하며 떠나보낼 수 없는 영원한 봄을 생각하는 것이 관념적 유희로는 즐겁겠지만, 실제로 우리는 나무나 봄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한 어린이가 열 살이라는 나이로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진지하게는 지탱될 수 없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는 그 아이가 열 살만 먹은 채 영원히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에 젖은 나머지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이 예전처럼 어린이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며,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별난 부모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이가 열 살이라는 나이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애가 열 살 먹은 아이로 남아 있는 것을 5년 동안만 지켜본다면 우리는 그 애가 차라리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과 그 아름다움은 살아 있는 실체이며, 고대 그리스 항아리에 조각된 것 같은 아름다운 공상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이 전개하는 아름다운 광경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 광경이 정지한다면 그것이 자아내는 경이로움 자체도 정지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봄철에 첫 뻐꾸기 소리를 듣거나 우리 동네 산사나무 생 울타리가 눈처럼 하얀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내가 불현듯이 충격적 환희를 느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월에 나무 위에 앉아 봄의 서주를 울리듯이 유쾌하게 소란을 피우는 까마귀들을 눈여겨본다든가 첫 앵초꽃의 등장이나 첫 제비의 출현을 찾아나서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고통스럽게 고별인사를 해야 하는 일이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황홀한 기분으로 반가운 환영인사를 하는 일 또한 없어질 것이다. 그 결과 나는 고대 그리스 항아리에서 볼 수 있는 정지된 목가적 풍경을 볼 수는 있겠지만, 살아 있는 세계의 마술적 경지는 잃고 말 것이다.

별장 문간에 이르렀을 무렵에 사라진 산사나무 꽃에 대한 나의 미련은 이미 묻히고 없었다. 이튿날이 되면 그 생 울타리에서 새 기적들을 보게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들장미와 인동덩굴 꽃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이어 블랙베리 꽃도 보일 것이다. 이런 것들이 끝나고 나면 다시 한 번 밝은 색깔의 들장미 열매와 산사나무 열매가 나타날 것이다. 뻐꾸기의 가락이 잦아든다 하더라도 지빠귀의 노래는 남아 있을 것이고, 지빠귀 다음으로는 빨간 조끼를 입은 작은 새6)가 음침한 겨울 내내 꾸준히 노래를 이어갈 것이다.

 

1) 19세기 영국 시인 존 키츠의 시 〈나이팅게일에 부침〉에서 인용된 구절.

2) 신문사들이 모여 있는 런던의 중심 거리 중의 하나이다.

3) 로버트 헤릭은 17세기 영국 시인. 여기 인용된 시는 〈수선화에게〉의 첫째 연聯이다.

4) 이 시의 두 번째 연에서 헤릭은 인생의 “봄”도 수선화 꽃처럼 수명이 짧으며, 아침 이슬이 사라지듯 쉽게 사라진다고 노래한다.

5) 키츠는 〈그리스 항아리에 부침〉에서 고대 항아리에 그려진 목가적 정경을 노래한다.

6) 영국의 텃새인 유럽울새(robin)를 가리키는 듯하다.

 

A. G. 가드너

알프레드 조지 가드너 (Alfred George Gardiner, 1865 ~ 1946)는 영국의 저널리스트, 편집인, 작가였다. 그는 22세 때 한 지방지의 기자가 되었지만, 저널리스트로서의 그의 역량은 1902년에 《데일리 뉴스》라는 전국지의 편집인이 되었을 때부터 발휘되었다. 그는 뛰어난 보도와 알찬 문예란 및 사회부정 타파운동 등을 통해 8만 부에 불과하던 《데일리 뉴스》의 발행부수를 7 년 만에 40만 부로 늘이는 한편 이 신문이 당대의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성장케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15년에 이 신문의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난 가드너는《스타》지에 에세이를 기고하기 시작하였고, 여생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산 도덕에 대하여>를 포함하는 수많은 명품 에세이를 썼다.

 

자연의 순환원리에 대한 통찰

 

                                                                         해설_ 이상옥

단아하고도 차분한 스타일로 쓰여진 가드너의 산문은 생활 주변의 평범한 진실들을 새삼스럽게 들춤으로써 독자들에게 절실히 다가오게 한다. 여기 옮긴 <산사나무 울타리에 대하여>는 에세이집 《해변의 자갈밭》에 실려 있는 것인데, 그의 에세이가 지닌 특성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산사나무’라고 옮긴 ‘White Hawthorn’은 잎, 꽃 및 열매가 우리나라의 산에 자생하는 산사나무와 아주 유사하다. 영국에서 산사나무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 초여름 꽃식물 중의 하나이며, 흔히 정원수나 생 울타리 나무로 심기도 한다. 산사나무가 5월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영어에서는 5월을 가리키는 May가 일반명사(may)로는 산사나무, 특히 그 꽃을 뜻하기도 한다.

이 에세이에서 가드너는 산사나무 꽃이 지고 없어진 데 대한 아쉬운 감정을 자연의 순환원리에 대한 통찰로 이어감으로써 단순한 신변기록으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글을 삶과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기록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이런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철학이 꼭 고담준론으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며, 생활 주변의 평범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도 높은 철학적 관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 서울대 인문대학장, 동대학원장 역임.

저서 《조셉 콘라드 연구》 , 《이효석의 삶과 문학》, 《두견이와 소쩍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