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문

 

박완서 정혜 엘리자벳 선배님께

 

                                                                                    최순희

그날 아침 아홉시경, 막 이메일을 체크하는데 방금 전에도 없던 선배님의 부고 기사가 인터넷 화면에 뜨는 것이었어요. 믿고 의지하던 큰 산이 무너져버린 것만 같은 그 황망하고 애통한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여기 저기 연락하면서도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동아 문인회 모임을 통해, 그리고 숙란 문인회 모임을 통해 진작부터 선배님의 상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치료에 전념하려는 가족들의 입장을 존중하여 모두들 문병을 삼가고 하루빨리 쾌유하시기만 기도하고 있었지요. 그래도 그토록 총총 떠나실 줄은 아무도 상상 못했고, 선배님도 차마 그렇게나 야속하게 가시면 안 되시는 것이었어요.

10월의 여문 모임 때는 선배님 댁 밑의 ‘아치울 큰 마당’에서 모이기로 했었다가 재검 때문에 취소되었고, 12월의 숙란 문인회 송년모임 때는 절친한 동기들이신 한말숙·김양식 선배님과 나란히, 팔순 축하를 받으신다기보단 거꾸로 저희 후배들에게 팔순 자축 턱을 내시기로 연초부터 약속이 되어 있으셨지요. 또 저는 “아무개보다 언니가 훨씬 미인이네.” 하며 칭찬하신 그 언니의 부탁으로 선배님의 신간을 여러 권 사놓고는 사인받을 기회만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이런 것도 제 남다른 친밀감의 설명이 될 수 있을까요.

선배님이 수술을 받고 치료받으신 바로 그 암센터에 제 옆지기도 비슷한 시기에 날마다 통원하며 치료를 받고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제겐 왠지 선배님과 더욱 가까워진 듯한 유대감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최대한 문병을 삼가는 편이 도와드리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그러므로 제게는 직접 달려가 문병할 ‘권리’가 생겨나기라도 한 양 ‘쳐들어가듯’ 가서라도 눈앞에 뵙고 쾌유를 빌고 싶은 적도 여러 번이었어요. 그런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그저 옹색한 카드 한 장에 결국엔 ‘존경해요.’와 ‘사랑해요.’ 단 두 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여러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곤 했었지요.  

돌이켜보면 선배님에 관한 한, 저는 뒤에서 혹은 앞에서 대놓고 버릇없이 쫑알거리고 자주 투덜거린 셈입니다. 인간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햇볕 아래 남김없이 샅샅이 까발리는 선배님의 작품들이 저는 통쾌하다기보다는 왠지 불편한 적이 많았어요. ‘우아 떨기’를 거부하는 솔직한 문장들이 위악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우리들의 치부를 가차 없이 드러내며 독자들의 절대적인 공감을 살 때마다, 저는 그 ‘우리’ 속에 포함되기 싫다고, 설마하니 내가 그렇게 속물일까 보냐고 자꾸만 버팅기고 싶은 심정이었거든요.

같은 해에 부군과 아들을 연이어 잃고도 그 처절한 슬픔과 통한을 낱낱이 기록하여 책으로 엮어낸 그 ‘강심장’에 ‘치를 떨면서’, 선배님의 작가적 근성에 아니 작가라는 족속들에게 경외에 앞서 혐오감을 느낀 순간들도 없지 않았었지요. 심지어는 칠순 무렵 펴내신 《아주 오래된 농담》과 그 몇 년 뒤 펴내신 연애소설 《그 남자네 집》이 연달아 막강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도, 저는 왠지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에 내심 이제 글을 그만 쓰셔도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답니다. 또 친지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선배님의 책을 잔뜩 사서 사인을 받으면서도, 저는 가난하고 잘 안 팔리는 무명작가들 책을 사주고 싶어도 모두들 선배님 책만 좋아해서 ‘하는 수 없이’ 산 거라며 종알종알 투정을 늘어놓곤 했었지요.   

물론 제 모자란 작은 반발심을 고쳐먹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작가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글을 쓰고 써냄으로써 삶의 고통과 아픔을 스스로 치유받고 치유해주는 사람들이며, 그런 작업은 목숨이 붙어 있는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선배님을 지켜보며 저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늦깎이로 등단하시고도 육십, 칠십, 팔십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그 누구보다 활발히 창작을 계속하신 작가적 자세에 저도 이미 진작부터 항복하고 말았으니까요.

오늘 영결미사가 끝났을 때, 저는 서둘러 현관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꽃으로 덮인 관을 남몰래 쓰다듬어 보며 제게도 부디 선배님의 재능과 근성의 1/10만 물려주고 가시라고 기도하는데, 바로 옆에서 “완서야!” 하는 비통한 부르짖음이 들려왔어요. 선배님을 그 이름으로 부를 사람이 달리 누가 있었겠어요. 한말숙 선배님을 부축하여 떠나오면서, 솟구치는 눈물 사이로 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버릇없는 투정을 부리고 말았어요. 누가 ‘개성깍쟁이’ 아니시랄까 봐, 가실 때도 그렇듯 깨끗하고 단호하게 떠나시느냐고 말이지요…….

선배님, 40년 전의 마흔은 지금으로 치면 쉰도 아니고 예순이라던 격려 말씀에 감사드려요. 청첩도 안 한 딸아이의 혼사에 남몰래 듬뿍 축의금을 챙겨주신 마음도 감사드려요. 아니, 그냥 거기 품 넓고 따스한 큰 산으로 가까이 계셔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이제 극복하는 게 아니라 다만 견디어 나갈 뿐이라던 지상에서의 고통 모두 잊으시고, 그리운 이들과 재회하여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십시오. 선배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수필가. 소설가.

산문집 《딸이 있는 풍경》, 《넓은 잎새들의 집 그리고 오래된 골목들의 기억》

장편소설 《불온한 날씨》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