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찾아가기

 

                                                                           허숭실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20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도 거울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은발의 얼굴을 떠올려 보다가 그만 고개를 저으며 “아직은 아니야.” 라는 말로 어렵게 다짐한 결심을 뭉개버린다. 정서적 가면을 선뜻 벗어 던지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도 여자로서의 외모를 포기하는 것은 알몸을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부끄럽게 느껴진다. 길을 가다가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매무새를 고치던 여자의 본능을 접을 수 있을까? 윤기 흐르던 까만 생머리는 많은 결점을 숨겨 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억새꽃처럼 하얗게 흩날리는 머리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를 생각하면 온몸이 오그라든다. “사람들은 타인의 모습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처음 보는 순간 잠깐 놀라겠지만 곧 눈에 익숙해져 버린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풍기는 인품의 여운일 뿐이다. 외모보다는 건강이 우선인 나이가 되었음을 받아들여라. 그래도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음을 감사하라.” 친구가 머리 염색 문제로 고민한다면 나도 그렇게 조언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내 문제이니 해답은 아는데 실행이 어렵다.

50대 초반에 잔설이 내려앉은 딸을 보시고 아버지는 마음 아파하셨다. 아버지 생전에는 허연 머리를 보여드리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그날로 머리 염색을 했다. 언제인가부터 탈모와 가려움증으로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염색 부작용을 겪고 있다. 다시는 염색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가도 모임에 나갈 날이 가까워지면 ‘이번에만’ 하고는 미장원으로 달려간다. 파파 할머니보다는 젊게 보이는 것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예의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탈모의 위험을 무릅쓰고 또 염색을 한다. 심려를 끼쳐드릴 집안 어른은 모두 떠나셨는데, 늦가을 석양에 서리맞은 흰 국화마냥 새들새들한 모양새를 아직도 감추고만 싶으니 그 무슨 치기인가.

우리 어머니 시대에는 머리 염색을 하는 분이 흔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세는 것을 순리라 여기고 순응하며 살았다.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에게서 인생의 연륜을 읽게 되고 면류관을 쓰셨다고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만 있으면 젊게 보이도록 가꾸는 것이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신을 가꾸지 않아서 추레하게 보이거나 늙어 꼬부라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무력하고 무신경한 소치로 돌리기도 한다. 머리 염색만이 아니라 얼굴과 몸매도 성형을 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더 아름답게 돋보이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유능하고 부지런함의 잣대로 인정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정서적 가면을 쓰고 심리적 만족에 취하며 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여러 겹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나 가면 뒤에 숨어서도 근원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유다. 에덴에서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때부터 자유를 찾아가는 길이 삶의 여정이 아니었던가. 진정한 자유는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그 길은 한없이 멀다.  

자연이 병들고 있음을, 지구가 파괴되어 감을 날마다 보고 듣는다. 인류에게 축복으로 다가온 과학문명으로 사람들은 편리하고 질 높은 삶을 누린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갖 기계들이 내뿜는 가스로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생태계는 파괴되고 있다. 인간의 둥지인 지구가 피폐해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그 심각성을 외면한다. 그러한 지구의 모습에서 젊게 보이고 싶은 마음을 잠재우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내 꼴을 본다.

머리 염색할 때마다 겪던 갈등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이 소소한 자유를 얻기까지 먼 길을 돌아서 왔다. 젊음을 받혀주던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대한 미련을 아쉬움 없이 내려놓고 가면을 벗어던지리라. 그리고 본디 내 모습을 찾아가리라.

다행히 우리의 병들어 가는 둥지를 지키기 위해 지구인들도 한목소리로 환경 보호를 외치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문학마을》 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이대 문인회 회원.

수필집 《꽃은 흔들리며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