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김 광

주로 혼자 다니는 여행에 익숙하다 보니 겨울에는 하늘이 조금만 흐려 와도 눈[雪] 걱정에 겁부터 난다. 그런 날이면 으레 꺼내보는 게 일기장이다. 그곳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단연 딸아이다. 일기를 보는 내내 딸아이가 머리를 휘젓고 다닐밖에….

그 애는 〈꽃밭에서〉라는 노랠 참 좋아했다. 어릴 적 유치원에 다녀와서 옹알대던 노래를 호말처럼 커버린 지금도 가끔 중얼거린다.

대학 졸업 후 이 년간이나 책과 싸워 언론사 기자로 취직해서도 환영식 때 그 잘난 〈꽃밭에서〉를 불러서 동료들에게 손사래를 받았다니 꽃밭 사랑도 이 정도면 못 말리지 싶다. 취직이 힘든 시국에 얼마의 월급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애비에게 용돈 달라는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취직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기특하긴 한데 그래도 난 불만이 많다. 툭하면 지방취재라고 사라지고, 대선주자 인터뷰라고 안 보이고, 서해안 기름유출 취재 간다고 없어지니, 조금 과장하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뿐인가. 토요일 일요일도 불러내면 나가야 하고, 촛불집회 취재 가서 물대포나 맞고 오고, 걸핏하면 야근이라며 전화하는 딸에게 “무슨 그런 회사가 다 있냐? 그만 둬버려라. 집에서 신부수업 하다가 시집이나 가거라.”하고 소리치면 “요즘은 직장생활하는 게 신부수업이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일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요.”하고 또박또박 맞받아쳤다. 그 뒤로도 나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댔으나, 기자라는 직업이 그런 것임을 모르지 않는 나로서야 그저 염려하는 애비의 잔소리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딸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있는데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빠! 아빠 책상서랍에 편지 써놨으니 퇴근하면 읽어 보세요.’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딸아이는 돌출행동을 하려면 꼭 이랬다. 대학교 다닐 때도 학생운동이다 뭐다 하며 날 애태울 때, 꼭 이런 식으로 편지를 남겼었다. 퇴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점심시간이 되자 집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딸의 편지는, “일 성격상 자주 집을 비우게 되고 이런 이유들이 아빠를 자꾸 걱정시키고 하니 차라리 회사 앞에 방을 얻어 독립하겠습니다.” 하는 통첩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결국은 내게 이별을 고하고 만 것이다.

“쿵” 집채만 한 바위가 가슴으로 들이닥쳤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는 건지, 내가 저 잘 되라고 한 소리였지 미워서 그랬나? 저희들밖에 모르고 산 나에게 이건 배신이었다.

저녁 늦게 들어온 딸을 불러 말했다. “너는 어째 그리 이기적이냐? 곧 있으면 네 동생도 군대 가고, 아빠 건강은 날로 안 좋아지는데, 뭐 집을 나가? 너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쓰러져 병원에라도 실려 가면 집에는 아무도 없고, 집안 꼴 잘도 돌아가겠다. 좌우간 알아서 해. 아빠 얼굴 다신 안 보고 살려면 나가고, 안 그러면 가만히 있다가 시집가면서 나가.” 나는 그 이후로 딸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스스로 단호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단호한 사람이 되면 뭐하나. 결국 나는 딸아이 이삿날 자동차로 이삿짐을 실어다주는 허약한 애비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도 딸아이의 고집에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저녁이면 문단속 잘하고 자. 가스 비 아낀다고 보일러 줄이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은 전화하는 거 잊지 말아.” 나는 차에 오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그날따라 왜 그리 시야가 흐려오던지….

다섯 손가락을 깨물어 어느 손가락인들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을까마는 딸아이는 내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다. 둘째 애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보았으니 그런대로 별 고생을 모르고 자랐고, 딸은 한참 어려울 때 낳아서 지지리 고생하며 자란 아이다. 서울서 맞벌이하는 부모를 그리워하며 할머니 손에서만 자란 아이다. 이랬으니 딸을 보는 내 눈은 늘 애잔할 수밖에 없다. 딸애가 초등학교 이학년 때에야 우리 가족은 이산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쪼개 적금을 붓고 있던 나는 만기가 되자 맨 먼저 딸애의 피아노부터 사주었다. 피아노가 들어오던 날, 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나의 볼을 비벼댔었다.  

서로가 떨어져 살 때, 어쩌다 시골에 가면 부모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 잘 때도 우리 손을 꼭 붙들고 잤다. 그러다 다시 서울에 올라치면 부모를 떨어지지 못해서 저도 울고 우리도 울고…. 이렇게 애틋한 부녀지간이었는데, 그랬던 애가 이젠 스스로 애비를 떠난다니 정말 기가 막혔다.

자식은 애물이라는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손가락이 곪아 썩어간다 해서 그 손가락을 자르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부모임에랴. 저를 위하는 소리였다고는 하지만 나의 잔소리가 딴에는 아프게도 들렸으리라. 서로에게 상처가 되느니보다는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해 보면, 가정의 소중함도 알고 또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딸의 말이 어쩜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울기도 잘하고 마음이 여리던 아이, 그 아이가 이제는 자라 어려서부터 갖고 싶었던 꽃밭을 가꾸고 싶나 보다. 마음 한편에 늘 작은 꽃밭을 두고 살던 아이, 채송화도 나팔꽃도 심어 놓고 애비를 졸라 새끼줄을 치던 아이.

‘그래 네 꽃밭 멋지게 가꾸어 봐라. 아빠가 새끼줄은 얼마든지 쳐 줄 테니 채송화랑 나팔꽃이랑 어울리게 가꾸어 보렴.’ 애비 없이도 끄떡없을 만큼 성장해버린 딸아이,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언제 이리 커버렸누?’ 일기장을 덮고 창가로 걸어갔다. 하늘이 유난히 낮게 내려온 게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 같다. ‘잘 있겠지…?’

나는 오늘도 딸아이의 꽃밭을 서성인다.

 

 

《문학세계》로 시 등단. 《계간수필》로 수필 등단(2004년).

계수회 동인.

시집 《바람이 사는 나라》,  《구름 몇 장 내게 주더니》, 공저 《시인의 바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