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 그 이후

 

                                                                            송미심

‘이럴 수가!’

밤이 깊도록 퇴고한 글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고친 글을 저장하고 고치기 전 글을 삭제한 뒤, 확인을 위해 다시 클릭했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컴퓨터 화면에는 꽉 차 있던 글 대신 글자 하나만 남아 깜박깜박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구상하고 또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쓴 것을 마무리하려던 참이었는데…. 더 나은 글을 만들겠다고 밤이 깊도록 고쳤는데 결국은 글을 모두 삭제해버렸으니 찬찬하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내가 한심했다. 글쓰기가 마무리되었다는 흥분에 들떠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어찌한다? 달리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컴퓨터에 달인이 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건져줄 사람을 찾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일뿐. 우두망찰하여 망연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깜박이는 커서에 붙어 있는 글자 하나가 낙서를 지운 책상 위에 남은 흔적처럼 께림칙해 보였다.

남아 있는 글자 하나마저 지웠다. 화면은 흐릿한 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텅 빈 백지가 되었다. 순간적인 컴퓨터의 삭제로 끝맺음이 간편하고 말끔했다. 일말의 미련조차도 한순간에 잘라버리는 비장한 절연, 화끈한 결단의 뒤끝이었다. 거치적거릴 것이 없는 개운한 공간이었다.

깨끗한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하얗게 눈 덮인 대지 같아 눈이 부셨다.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치우고 난 후처럼 개운했다. 잡다한 생각조차 정지되어 터분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보고 있을수록 그곳이 오히려 가득 차 보였다. 도연 스님의 그림을 보고 있을 때처럼.

뭉게구름 가득한 파란 하늘 아래 흙길이 있고 그곳에 오래된 나무 걸상 하나 달랑 그려져 있었다. 청개구리 한 마리 삐걱거릴 것 같은 걸상 귀퉁이에 올라 앉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하늘, 땅, 빈 의자, 그리고 앙증맞은 청개구리 한 마리뿐인데도 편안하고 충만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웬 조바심일까, 금세 텅 빈 공간에 어수선한 기억들이 밀려와 자리를 잡으려했다. 밤이 되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열감기처럼 정적만이 감도는 한밤중이면 달갑지 않은 추억들이 빈 곳을 채우려 안달이었다. 웃음 짓게 하던 일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떠오르지 않고, 얼굴 화끈거리게 했던 순간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이밀었다. 눌러 가라앉혀 두어야 할 기억들이 두서없이 아우성을 쳐대며 자리다툼을 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마음 다스리기가 서툰 탓에 쓸데없이 망념妄念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다.  

눈이 휘둥그레할 만한 작품도, 가슴속에 알싸하게 훈기를 불어넣을 정도의 대단한 글도 아닌 하찮은 신변잡기를 부여잡고 이리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마음을 비워보기로 했다. 움켜쥐고 매달렸던 일들을 포기한 후에 느낄 수 있었던 후련함이 찾아들었다. 미련을 버리는 것, 집착에서 비켜서서 허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일일 터, 사는 동안 겪게 되는 여덟 가지의 고통도 마음을 이렇듯 내려놓으면 가벼워지지 않을까. “빈 의자에 마음 내려놓고 좀 쉬세요.”라는 도연 스님의 화폭 글귀가 자꾸만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새들은 하늘을 날기 위해 뱃속의 음식물을 모두 배설해야 하고, 단소는 청아한 소리를 얻기 위해 속을 텅텅 비워버리는 거라 한다. 새처럼, 단소처럼 가슴에 안고 몸부림쳐봐야 무용지물인 생각들을 버려 마음을 가볍게 할 수는 없을까. 자질구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미적미적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 컴퓨터 삭제키처럼 단번에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리고 싶은 때가 더러 있다. 사람은 기계와 달라 그리 될 수는 없는 일. 비우고 나면 채우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또 상리常理이다.

마음을 다잡아 날아가 버린 글 조각들을 더듬어 정리하기로 했다. 컴퓨터 글쓰기 화면을 새롭게 띄워 올리고 없어진 글의 순서를 생각해 보았다. 퍼즐을 맞추듯 이어가긴 했지만 어휘 하나, 부호 하나도 글을 쓰는 순간에 따라 달라지기에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맞춘다 해도 처음과 같은 글맛이 나랴 싶었다. 시점에 따라 정감의 깊이가 달라지니 처음보다 더욱 힘들 것 같았다.

소설 쓰기를 마무리하여 뭉쳐두었던 원고를 하녀가 불쏘시개로 써버려 다시 썼다는 중세의 어느 작가의 일화가 떠올랐다. 세계적인 작가도 사라져버린 원고를 살리려다 더 나은 작품을 창조했다지 않은가. 그런 성과가 내게도 어울리길 기대하면서 조금씩 연결해보기로 했다.  

생각처럼 쉬운 것이 있을까. 몇 줄 쓰지도 못한 채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앉아 새벽을 맞았다. 널찍하게 비어 있는 컴퓨터 화면이 낑낑대고 있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국수필》(1997년)로 등단.

광주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수필집 《여덟 봉우리에 머문 눈길》.

현재, 광주문협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