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 칼럼|

 

우리 수필, 자폐증에서 벗어나자

 

고봉진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주위의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인다. 모두가 새로운 세계에 스스로를 적응해 가며 다양하게 자기 성장을 이룩해 가고 있다.

우리 수필계도 변하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신인들이 등장하고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양적인 팽창으로 보아서야 지금보다 변화가 더 왕성했던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작품 내용들을 보면 별로 새로운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형식이나 주제나 소재 선택에서 새로운 시도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난 세기 1930년대나 1960년대 1970년대에 이룩했던 것과 같은 새로운 질적 도약을 찾아볼 수가 없다. 모두가 서정수필에 일방적으로 경도해, 혁명적인 정보산업화 시대를 살면서도 그것이 몰고 오는 우리 삶의 변화를 반영하려는 새로운 논리의 글이나 참신한 감각의 작품이 나올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 수필계의 완고한 자세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 지향해야 할 수필의 정도正道는 아니다.

몽테뉴는 ≪에세≫를 쓰면서 자기 자신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그러한 시도에 의하여 얻게 되는 결과를 꾸밈없이 기록하겠다고 했다. 자기 자신만을 탐구한다는 일은, 공동空洞과 같이 텅 비어있는 자기 내면만을 들여다본다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자아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즉 타자와의 교섭이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나를 둘러 싼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설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가려고 했다.

몽테뉴는 자기가 지금 여기에서 경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타자 즉 세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가 살고 있는 자연과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익혀 온 습관이라는 제2의 자연이 그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살고 있는 일정한 장소에서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자아란 결국 이러한 두 가지 자연에 의하여 한정된 자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몽테뉴는 이러한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독서를 하고 여행을 하는 것으로 다른 환경에서의 자기, 타자의 시점에서 보는 자아를 파악하기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몽테뉴의 이러한 노력은 19세기에 와서,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저술가라는 그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 16세기의 모럴리스트라는 평가를 획득하게끔 한다. 모럴리스트란 단순히 한 사회의 모럴, 즉 도덕만을 운운하며 보수적인 입장에서 모럴을 지켜가자고 주장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회의 사회문화적인 면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며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사람들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모럴리스트는 17세기에는 라로슈푸코, 라 퐁텐이 있었고 20세기에 와서는 프루스트, 지드, 카뮈 등이 있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그들과 같은 모럴리스트가 되기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 수필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나는 무엇을 아는가?” 를 활발히 추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통찰하고 넘어 서야한다. 스스로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자폐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