散策(산책) Ⅱ

-하늘, 해와 저녁놀, 달과 詩, 그리고 별

 

정진권

 

우선 하늘에 관하여

 

땅만 굽어보고 아옹거리며 사는 사람아-.

오늘은 포켓용 소주 한 병 찔러 넣고 山 한번 올라 보게나.

 

그러면 짙푸른 숲 위로 아스라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보일 걸세. 아니, 안 보일지도 몰라. 요즈음은 구름이 많으니까. 그만큼 비도 자주 오고. 게다가 심심하면 안개야. 불청객 황사는 한술 더 뜨고.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늘과 무관한 거야. 자네 구름 위 날아본 일 있지? 하늘은 늘 푸르다네. 그까짓 아랫것들 하찮은 시비에 하늘 그 푸른빛이 변하겠나? 변하면 그건 하늘이 아냐.

그런데 말일세, 하늘은 푸르기만 하지 않고 늘 비어 있다네. 스스로 비웠기 때문이야. 왜 비웠을까? 맞아, 비우지 않으면 해도 달도 별도 운행할 수 없으니까. 눈비, 안개구름, 천둥번개도 그래. 하늘이 비워주지 않으면 내리지도 흐르지도 치지도 못하는 거야. 그러니 허허, 비웠다 비웠다 하면서 더 꽉꽉 채운다면 이 세상 어느 누가 그를 보고 하늘이라 하겠는가? 턱도 없는 소리지.

자, 화제 좀 바꿀까? 어느 옥편을 펼치고 하늘天자를 찾아봤더니 至高無上(지고무상)이라고 했더군.≪淮南子(회남자)≫에 “道(도)는 지극히 높아서 그 위가 없고, 지극히 깊어서 그 아래가 없다(道, 至 高無上, 至深無下.).”는 말이 있다. 이 옥편은 道의 높음을 설명한 말을 하늘의 높음을 설명하는 데 원용한 모양.

하늘은 지극히 높아 그 위가 없다는 거야. 그럼 땅에서는 누가 至高無上일까? 당연히 임금이지. 그런데 참 이상한 일, 자기가 제일 높아 그 위가 없는 임금이 오히려 백성으로써 하늘을 삼았다, 이거야(王者以民人爲天-史記). 史記(사기)≫에 “임금은 백성으로써 하늘을 삼고, 백성은 밥으로써 하늘을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는 말이 있다.

아, 오늘의 민주정치여, 저 옛 임금들 앞에 부끄럽지 않나?

 

부끄러울 거야. 아니, 뭐가 부끄러우냐고, 허허.

석양이네. 병마개 따게나. 속이 짜르르할 걸세.

 

 

다음은 해와 저녁놀

 

이봐, 우리 함께 山에서 어느 하루 지내보지 않겠나?

여전히 해가 뜰 게야. 그리고 한낮이 지나면 질 테고-.

 

어느 시인이 낙산사에서 동해에 해 뜨는 것을 보았다네. 그리고는 그 장엄함에 감격한 나머지, “꿈틀대는 용들이 불을 토해 내더니/붉은 해 이글거리며 물 위로 치솟는다(蜿蜿百怪皆含火, 送出金輪黃道中.-崔岦).” 이 詩의 제목은 <洛山寺八月十七日朝>, 앞 두 구는 “새벽 맑은 하늘에 달이 지는데/바다 물결 홀 연히 붉게 물든다(玉宇迢迢落月東, 滄波萬頃忽飜紅.).”- 大東詩選(대동시선)

고 했대. 그러나 모든 해가 다 그토록 장엄하게 뜰 거야 뭐 있나? 나는 일찍이 바다를 못 봐 그런지 그런 장엄한 해보다는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박두진, 해)” 이 詩의 끝 연에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는 구절이 있다. 장엄하지 않으면서 퍽도 아름다운, 그리고 싱그러운 희망을 느끼게 한다.

가 좋더라.

맞아, 말갛게 씻은 얼굴, 그건 말갛게 씻은 마음이야. 해에게는 하늘이 부여한 사명이 있어. 뭇 생명들로 하여금 그 자아自我를 실현케 하라는. 그가 그 맑은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그는 이 사명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파世波를 타고 먹구름을 자초, 빛도 볕도 다 잃은 해가 있네. 자신에게도 우리에게도 그건 다 재앙인데 그는 홀로 그걸 몰라.

자, 저기 서산머리 좀 보게. 벌써 저녁놀이 붉게 타네. 해가 지는 거야. 말갛게 씻은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해 우리의 존경을 받던 해든, 빛도 볕도 다 잃어 우리가 재앙으로 알던 해든, 다 저렇게 지고 마네. 그러나 그가 지면서 태우는 노을빛은 전혀 다를 거야. 하나는 “할 만큼 했네.” 하는 흡족의 빛, 하나는 “어쩌다 내가?” 하는 회한의 빛-. 해들이여, 이 빛을 기억하시라.

 

나는 해로 태어나지 않았네. 따라서 그런 사명이 없어.

그런데도 내 저녁놀은 무슨 빛일까, 두려울 때가 있네.

 

이번엔 달과 詩

 

나는 달을 보면 슬퍼지네. 조각달도, 반달도, 온달도 다-.

오늘밤엔 무슨 달이 뜰까?

 

아, 조각달-. 저기 좀 봐. 銅雀(동작)나루 서편에 조각달은 찬데 놀란 기러기 한 쌍이 물을 건너네(銅雀津西月似鉤, 一雙驚雁度沙洲-丁若鏞). 지금(辛酉迫害, 1801) 丁若鏞(정약용)이 멀리 長鬐(장기)로 귀양길을 떠나고 있다. 이 詩의 제목은 <驚雁(경안, 놀란 기러기)>. 셋째, 넷째 구는 “갈 숲 흰 눈 속에 이 밤이 새면/슬퍼라, 내일은 또 헤어질 것을(今宵共宿蘆中雪, 明日分飛各轉頭.).”- 丁茶山詩文選(정다산시문선)

 귀양 가는 남편을 그 아내가 따라오는 거야, 어린 걸 안고 果川(과천)까지. 둘 다 철렁거리는 놀란 가슴으로 나루를 건넜겠지. 허술한 여관집, 마음은 또 얼마나 추웠을까? 이 밤이 새면 헤어져야 하는데-. 하늘이 도우시어 어서 풀리게 하소서.

자네 저 반달 보이나? 織女(직녀)는 옥으로 만든 얼레빗이 하나 있었어. 그래 7월7석, 그 빗으로 머리 곱게 빗고 牽牛(견우)를 만났지. 1년을 기다려 온 그 가슴들 얼마나 뛰었을까? 그러나 어느새 닭이 우네. 가여운 織女, 이젠 누굴 위해 머리를 빗니? 그래 옥으로 만든 그 얼레빗을 하늘에 던져버렸어(牽牛一去後, 愁擲碧空虛.-黃眞伊). 이 詩의 제목은 <半月吟(반월음)>또는 <詠半月(영반월)>, 다 반달을 읊는다는 뜻. 앞 두 구는 “뉘 라서 곤륜산의 옥(玉)을 다듬어/직녀아씨 얼레빗을 만드셨나요(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韓國女 流漢詩選(한국여류한시선). 곤륜산은 옥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그게 저 반달이래. 슬픈 빗, 織女의 얼레빗.

아니, 벌써 추석이네. 옛날 詩文(시문)과 歌舞(가무)에 뛰어난 한 여인이 있었어. 그러나 미천한 妓女(기녀)였어. 아니, 나그네였어. 천하게 살아야 하는 고향이 싫어 멀리 떠도는-. 그날 밤도 어느 낯선 산촌에 괴나릴 벗었어. 여인은, 둥근 달 쳐다보며 개는 짖는데 떡방아 찧는 소리에 애가 끊겼어(誰堪山杵響, 犬吠月蒼蒼.-金雲楚). 이 詩의 재목은 <宿檢秀(숙검수, 검수에 자며)>. 앞 두 구는 “외로운 기러기이듯 나는 나그네./오늘도 낯선 산촌에/괴나릴 벗네(寒鴈高飛遠, 浮生半異鄕.).”- 雲楚堂詩稿(운초당시고)

3) 탁월한 재능, 미천한 신분, 싫은 고향이 그리운 여인-.

 

떠나는 것은 슬픈 일이야. 어쩔 수 없어서 더 괴로운 일이고.

하느님은 왜 만남을 지으시며 떠남을 예비하셨을까?

 

끝으로 별에 관하여*

 

별이 있어서 나는 밤하늘이 좋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고 작되 분명한, 아 저 별-.

무더운 여름날, 소년이 소를 몰고 돌아오는 석양이었다. 안산 밑 샘에서 물 긷던 아랫집 순이 누나가 더운데 물 한 모금 먹고 가라며 손짓을 했다. 소년은 물바가지를 받으며 저도 모르게 순이 누나의 삼베 적삼 봉긋한 곳을 흘깃 보았다. 얼굴이 화끈했다. 그날 밤 소년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에 혼자 누워 순이 누나를 생각했다. 하늘에선 맑고 푸른 별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데.

별을 보면 고향이 그립다. 안산 위에 똑똑 푸른 별 뜨는 곳. 아니, 별은 산 위에만이 아니었다. 밤물 길어가는 분이의 물동이에도 뜨고, 길어가다 흘깃 성황당을 바라보는 분이의 까만 두 눈에도 떴다. 성황당 너머엔 냇물이 흐른다. 장 보고 늦게 돌아오는 삼돌이가 바지 걷고 건너는 그 물에도 별은 떴다. 댕기 한 감 몰래 끊어 품은 삼돌이의 더운 가슴엔 분이가 별이 되어 와 뜨고.

자, 詩 한 구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 서시). 별을 노래하는 마음, 그건 어떤 마음일까? 혹 純粹無垢(순수무구), 그런 것일까? 별은 언제 보아도 맑다. 나는 한때 별처럼 맑은 영혼으로 한 삶을 살리라 했다. 그러나 純粹無垢를 지키려 한 것은, 내게는 과욕이었다.

 

별을 보면 순이 누나가 그립다. 분이와 삼돌이가 그립다.

그리고 내 때 묻은 영혼이 좀 가엾다.

* 이 글은 필자의 다른 글과 일부 중복되는 점이 있다. 양해하시길-.

 

 

한국체육대학 명예교수. 전 문교부 편수관.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빛깔들의 합창≫ 역해서 ≪한국고전수필선≫ 등. 선집 ≪자장면≫ ≪빛깔들의 합창≫. 번역서 ≪'한국 한시선≫ ≪한국고전수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