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그리고

-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

 

유혜자

 

웃음기를 거두고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등장한 백건우 씨의 긴장된 모습은 청중의 숨소리까지 죽이게 했다. 고개를 숙인 채 혼신의 힘으로 강렬하게, 혹은 약한 터치로 복잡 미묘한 리스트의 정체성을 짚어내어 합창석까지 채운 2천 명 청중을 몰두시키고 있다. 이미 1982년 최고의 비르투오소로 이름을 높여가던 백건우 씨가 런던과 파리에서 6회에 걸쳐 가졌던 리스트(Liszt, Franz 1811-1866) 연주회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다시 리스트 탄생 2백 주년을 맞아 ‘문학, 그리고 피아노’라는 제목의 연주회(2011년 6월 19일, 예술의 전당) 이후 일주일 만에 ‘후기 작품, 그리고 소나타’(6월 26일) 연주회를 갖는 예술의 전당에 왔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연주에 매혹되어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고 싶어 했다. 파가니니에게서 남성적이면서도 활기찬 외형적 화려함을, 친구이던 쇼팽에게서는 깊은 서정성을 끌어내어 자신만의 거인적인 피아니즘을 확립, 불세출의 연주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래서 파가니니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한 사랑과 사랑을 통한 고독이 어울려 주옥같은 연주를 했다는데, 백건우 씨의 연주에서 그 리스트의 특징을 알아낼 수 있을까.

악단이나 대학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면 그들이 성장하도록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전문 연주가로만 활동하는 백건우 씨는 좋은 음악엔 항상 영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작곡가의 영혼을 탐색한다. 라벨, 메시앙, 라흐마니노프, 베토벤 등 작곡가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구도자의 자세로 연주가의 길을 걸으며, 남아 있는 시간을 열심히 해도 하고 싶은 만큼 못할 것 같다는데 이번 리스트 연주회에서는 어떤 영혼을 감지해냈을까.

첫 곡인 <5개의 헝가리안 포크송>은 신중하게 음들을 탐구하는 듯했고, 12세에 고향 헝가리를 떠나 20세에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려고 하루 10시간씩 맹연습으로 화려하고 열정적인 연주가로 성공한 리스트가 생각났다. 그러나 ‘나의 절반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이며, 나머지 절반은 헝가리 출신의 집시’라며 방황할 때 향수의 애달픔도 따라다녔음을 짐작하게 했다. 두 번째로 충분히 감정을 살린 <로망스>의 서정적인 선율에 빠졌다가, 놀라운 기교와 끊임없이 커지면서 폭발시키는 <무곡과 행진곡>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반부의 마지막 곡 ‘순례의 해 3년 중 <마음을 정결하게>’를 들으며 젊은 날 유부녀와의 뜨거웠던 불륜, 불세출의 피아니스트로서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나이 들어 사랑, 쾌락, 명성 등을 한갓 꿈의 그림자로 접어두고 그가 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를 생각하며 휴식시간 이후 있을 마지막 곡 <소나타>b단조를 기다렸다.

내가 처음 호로비츠의 연주음반으로 이 음악을 접했을 때만 해도 낭만적이거나 달콤한 멜로디도 없는 난해한 곡이어서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첫 부분의 타건打鍵 이후 잠시 침묵, 또 한 번 치고 침묵, 이어서 몇 소절의 선율이 나오는 것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해설집의 ‘크고 작은 모티브들이 모두 상반된 성격의 상징성을 지닌다.’ 는 대목에서 언뜻 쾌락을 갈망하면서도 신앙심, 종교에서 구원을 얻으려던 작곡자 내면에서의 치열한 싸움이 아닐까, 상상을 해봤다. 그리고 “집시와 종교인, 전혀 다른 이미지이지만 리스트는 이와 같이 전혀 다른 두 면이 공존하는 사람이었다.”고 백건우 씨가 인터뷰에서 한 말 때문이기도 했다.

30분짜리 이 작품은 구성면에서 연주자와 분석가마다 의견이 다른 작품이지만, 신을 두려워 한 종교인이자 매력적인 인간성을 지녔던 리스트의 모습 전체를 이 음악이 대변하고 있다고 해서 애착을 갖게 되었다. 바그너가 장인丈人 리스트의 이 유일한 소나타에 대해 “모든 개념을 초월하여 아름답고 위대하고 애정에 넘쳐 있다. 깊이가 있고 그리고 높다. 당신 자신과 같이 숭고하다.”고 했다지만 자유로운 구성의 교향시들의 방법과 유사한 무형식으로 비판을 받았었던 이 음악을 백건우 씨는 어떻게 들려줄까 기다렸다.

자신이 추구하는 구원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쓴 <소나타> b단조, 작곡자가 추구한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는 백건우 씨의 화려한 테크닉과 파워 넘치는 타건에 압도되어 앞부분의 침묵 부분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소나타> b단조의 마지막 음을 치기 위해 거슬러 내려가던 피아니스트의 손이 최저음 ‘b'를 누르더니 얼마쯤 침묵이 흘렀다. 아, 악보에는 없는 침묵이었으나 청중들은 그 침묵을 인정한 후에야 폭발적인 박수를 보냈다.

헝가리에 홍수로 피해가 컸을 때 자선공연으로 조국을 돕고, 부다페스트에 음악원을 세워 제자를 양성했는가 하면, 노년에는 세속의 명예를 버리고 신부가 되었던 리스트의 구도적 자세.

백건우 씨는 진지하게 작곡가와 연주가로서의 리스트를 구도자의 자세로 탐구해온 리스트 연주회에서, 청중에게 긴 수식어의 찬사를 나누기보다 숨을 내쉬는 말없음표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가장 깊은 감정이란 항상 침묵 가운데 있다.”(토마스 무어)던가.

 

 

한국문학상 수상(92년). 펜 문학상 수상(2002년). 전 MBC라디오 FM부장.

수필집 ≪세월의 옆모습≫, 음악에세이 ≪차 한 잔의 음악 읽기≫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