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이가 가는 날

 

구양근

 

오늘은 수영이가 가는 날이다. 8개월 동안 수고 많이 하고, 정든 대만을 뒤로 하고 떠나가는 충청도 아가씨. 관저요리사라는 꿈의 직장을 잡았다고 좋아하던 수영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관저요리사를 찾기 위해 외교통상부 명단에 올라있는 주소로 전화를 하던 아내는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서 걱정을 했다. 남자 요리사는 많지만 아내가 원하는 사람은 여자요리사다. 나도 남자요리사는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방에서 전문대를 갓 졸업한 겨우 스무 살짜리 여자가 한 명 있다고 했다. 한식요리사 자격증은 있고 김치 콘테스트에서도 상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그 대학 교수가 추천해서 관저요리사 명단에 올라왔다고 했다.

아내는 이 아이라도 써야겠다고 했다. 자기가 대학에서 강의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어린 학생을 다루는 데는 경험이 있고, 또 수하 사람하고는 죽이 잘 맞는 특기가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수속을 밟아서 대만에 온 수영이는 아니나 다를까 아직 촌티가 가시지 않은 어린 학생차림 그대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김세가 나이답지 않게 수더분해 보이는 거였다.

전 요리사에게 귀국을 미루도록 하고 한 달을 겹치게 하면서 교육을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전 요리사의 한 달분 봉급은 내가 사비로 부담하기로 했다.

관저만찬이 있는 날은 주방 도우미와 2명의 홀 도우미가 지원되기 때문에 바쁜 손을 돕기는 하지만 요리만은 철저히 관저요리사가 혼자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큰 만찬을 힘겨워 하기는 하지만 그런 데로 이겨내고 있었다. 무척 대견스러웠다.

처음 공관장으로 임명을 받아서 올 때는 서울 아파트에 파출부로 오던 아줌마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몰라도 너무나 모른 무모한 짓이었다.

임지에 막 도착하자 영국대사, 일본대사, 인도대사, 싱가포르대사 등이 관저초청을 했다. 초청을 받아서 참석한 우리 부부는 서로 얼굴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 나라 최고의 코스요리들이 차례차례 나오고 있었다. 어느 고급호텔에서도 볼 수 없는 정수들이 눈앞에 놓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줄도 모르고 평범한 파출부를 데리고 왔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식이 빚은 난센스였다. 처음 6개월 동안은 단 한 번도 관저만찬을 치루지 못했다.

두 번째로 온 관저요리사는 우리 부대표가 다른 대사관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요리사라고 소개한 사람이었다. 관저요리사 경험도 6년이나 되고 자격증도 여러 개 있는 사람으로 나이도 60세가 다 된 베테랑이었다. 깔끔하고 능숙한 솜씨로,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시간 간격으로 요리가 나오는 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처음에는 한없이 좋더니 나중에는 도도한 관저요리사의 티를 내기 시작했고 아내의 말도 잘 듣지 않았다. 그보다 제일 큰 문제는 성당을 다니면서 관저에서 벌어진 내부사정을 교포들에게 낱낱이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교민들은 관저소식이면 무엇이나 관심거리인지라 우리의 사생활이 샅샅이 공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수영이는 일은 그런대로 해내고 있지만 부지런하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것이 흠이라고 아내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너그러이 봐주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지금 저 나이라면 다른 아이들은 늦잠 자고 엄마가 깨워서 밥 먹여 학교 보낼 나이가 아니냐고. 그래도 얼마나 대견스러우냐고.

관저요리사는 작은 일 같지만 어찌 보면 큰 일일 수도 있었다. 요리사에 너무나 집착하는 아내가 못 마땅하기도 했지만, 하기야 아내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관저요리사 문제로 우리 부부의 신변이나 대사관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슥한 시간인데 내 방으로 들어온 아내는 나더러 일어나 앉아보라고 한다. 이 야밤에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수영이 문제라고 하면서 옷을 입고 응접실로 나오라고 했다. 처녀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밖으로 나오니 저 방에서 수영이가 엉엉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고 했더니, 수영이 어머님이 돌아가셨단다.

수영이 어머님은 만성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데 딸 자취방에 김치 담가주러 갔다가 쓰러지셨다고 했다. 다니던 큰 병원에 갈 시간도 없어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으나 손을 못 쓰고 말았단다. 긴급 상황으로 한국을 다녀온 수영이는 어느 날 아침, 식사 후 차를 마시는 시간에 할 말이 있다고 가까이 다가섰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니면 집안의 대소사들을 누구도 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허락을 받은 수영이는 벌써 고향 태안의 어느 유치원 요리사로 이력서를 냈고, 그 쪽에서 채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집에서 버스 몇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인가고 물었더니 태안은 아직도 버스 정류장이 없단다. 손을 들면 태워주고 내려달라면 아무데서나 내려 준단다.

그렇게 태평한 곳에서 일생도 태평하게 잘 보내야 될 텐데, 부디 어린 가슴이 더 이상 상처받지 말고 모든 일이 술술 풀려 나가기를 하늘에 빌어본다.

 

 

전 성신여대 중문학 교수 겸 총장.

수필집 ≪새벽을 깨는 새≫외.

현재 대만 대사로 부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