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가지고 우울은 버려라!

 

최상묵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알게 되고 사랑하고 그리고 헤어지고 하는 많은 슬픈 사연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슬픔이야 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서 가운데 가장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것이고 모든 문학과 예술의 전형적인 시금석 같은 것이다. 행복감에는 얄팍함과 속된 기쁨 같은 게 있지만 슬픔은 어떤 행복도 따라오지 못하는 깊고, 아름답고, 위대한 충만감 같은 게 있다. 슬픔은 반드시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니다. 구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슬픔에 잠기는 것은 슬픔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슬픈 감정 속에는 자신감이 담겨있어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인내심이 많고 현명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사사로운 슬픔을 밖으로 내밀어 항상 표현하는 것은 고상하지 못한 행위일 뿐 아니라 품위 없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깊은 물이 소리 나지 않는 것처럼 극도의 슬픔은 밖으로 내밀려 지지 않는다. 건강한 순간을 매번 고마워하지 않는 것처럼 슬픔이 없는 상태를 늘 기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슬픔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물론 슬픔이 깊어지면 참담해지고 일상생활을 가로막은 지독한 번민과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다. 때문에 슬픔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재조명하기 위한 강제적으로 부여 되어 지는 잠깐의 생리현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엉망이 되어버린 자기생활에 대해 시간을 가지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막간’ 같은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슬픔은 때로는 남에게 터놓고 이야기 하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을망정 많이 누그러질 수는 있다. 극단적인 슬픔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 슬픔에 항복하고 말든가, 아니면 그것에 익숙해지든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신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인간에게 주지는 않았다. 슬픔은 오래된 즐거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을 느낄 때 뇌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며 어떤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는 것일까? 슬픔의 실체를 이해하고 분석하려면 슬픔과 유사한 슬픔보다 훨씬 복잡한 ‘우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지난 세기 동안 악명을 떨쳤던 질병들은 에이즈, 암, 심장병, 성인당뇨병, 알츠하이머 등이었다. 요즘 이런 질병들의 위협에 못지않게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질병으로 ‘우울증’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우울증은 현대 정신병의 교과서적인 대표가 된 셈이다. 우울증은 신경질환을 일으키는 유전적, 신경화학적. 호르몬적 장애를 일으키는 생물학적 현상으로 환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질병이다. 선진국 사람들의 15%정도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는 예사로운 현상은 아니다. 지난 50년간 지속적으로 발병률이 상승되고 있는 의학적 재앙으로서 우려하고 있는 실증이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우울증은 스트레스 요인이 있은 뒤에 다시 평형으로 회복하는데 실패하면서 서서히 스며드는 무력감에 굴복하여 우울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현상을 말한다.

현대적인 삶의 복잡하고 다양한 환경에 우리 몸이 어떤 외부 환경의 도전적 상황을 분산 시킬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스트레스가 언제 오며 또, 얼마나 우리 몸에 해로운지를 예상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가 없다. 그 결과로 생기는 좌절의 배출구를 찾지 못하게 되면 생물학적으로 우울증에 걸릴 위험에 놓이게 된다.

우리들의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원인은 너무도 많지만 대체적으로 우리들을 바치고 있던 전통적인 원천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내리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도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문화에서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같이 평생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인 사치를 누릴 수는 있지만 과연 그 자격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의식도 따라 향상되었는가에 대한 혼란을 겪게도 된 것이다. 이런 것들이 과연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것인지 갈등하면서 공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면서 우리는 살고 있다. 자신의 인간 조건에 대한 성찰과 연민에 대한 갈등을 많이 겪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이 바로 우울증세인 것이다. 과연 현대의학으로 우울증을 박멸할 수 있을 것인가? 삶의 방식이 변해가는 것을 막을 사회적 백신 같은 것이 결코 출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래의학은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우울증 정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 할 것이다. 또 스트레스나 무기력증의 상황에서 분비되는 일부 호르몬이 우울증과 관련된 신경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밝혀내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우울이라고 말하는 것은 슬픔과는 그 뜻이 다르다. 슬픔은 어떤 대상을 상실했을 때 어느 기간 동안 서러움과 연민을 느끼는 정상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지만. 우울은 객관적인 상황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정서의 병리현상이다. 슬픔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효과적인 신호 역할을 해 줄 수도 있지만 우울증은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사람들을 피해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우울증과 슬픔의 차이는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오래 지속되는 극단적인 슬픔은 어떤 친구나 가족들도 도와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우울증이란 진단을 받게 된다.

문명인을 사로잡고 있는 만성적 우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에 대한 무능력이며 우리의 육체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 있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쁨도 경험할 능력도 없는 것을 말한다.

우울한 사람은 슬픔을 느낄 수만 있어도 크게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문명시대에 살고 있는 보통사람들은 상당한 재미와 쾌락을 맛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우울하다. 우울은 육체의 불쾌함이 아니고 마음의 변이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복판에 살면서 자기의 모든 감각을 조용히 간직하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암담한 우울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전하고 순진한 귀로 들으면 어떠한 폭풍도 바람의 신의 노래 소리로만 들린다. 소박하고 용감한 인간을 천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갖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H.D 소로”

 

 

전 서울대학교 치과대병원 원장.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수필집 ≪우리는 神이 아니다≫ ≪치의학적 산책≫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