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산문⑫

 

법 앞에서(Vor dem Gesetz)

 

프란츠 카프카, 한석종 역

 

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시골서 온 한 남자가 문지기에게 다가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시골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다면 나중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능하지요”하고 문지기가 대답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안되요.”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느 때처럼 열려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서 있어서 그 남자는 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여다보려고 몸을 구부린다. 문지기는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마음이 끌리면 내가 금지해도 구애받지 말고 들어가려고 애써보시오. 그러나 내가 막강하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나는 최말단의 문지기에 불과하지. 하지만 방을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점점 더 막강한 자들이지.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도 아찔해.” 시골 남자는 이러한 어려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모피외투를 걸치고 있는 문지기의 모습을 더 자세히 뜯어보고, 그의 큼직한 매부리코며 길고 듬성듬성하게 자란 시꺼먼 타타르인의 콧수염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그는 출입증을 받을 때까지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는 그에게 의자를 내어주며 문 옆에 앉아 있게 한다. 그는 거기에 앉아서 수많은 날과 해를 보낸다. 그는 입장하려고 끝없는 시도와 간청을 하면서 문지기를 지치게 만든다. 문지기는 간혹 간단한 심문들을 하고 고향에 대한 것 등 여러 가지를 묻지만 그것들은 높은 사람들이 하듯 관심 없는 질문들이며, 마지막에 가서 그가 늘 반복해서 한 이야기는 그를 아직 들여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가지고 왔는데 상당히 값진 물건도 있었지만,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써버린다. 문지기는 모든 것을 다 받아 챙기며 그때마다 “내가 이것을 받는 것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라고 말한다. 여러 해를 보내면서 그 남자는 문지기를 거의 끊임없이 관찰한다. 그는 다른 문지기들을 잊어버리고, 이 첫 번째 문지기가 그가 법으로 들어가는데 유일한 방해로 여겨진다. 그는 이 불행한 우연을 저주하며 처음 몇 년을 막무가내로 큰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에 늙어서는 속으로 혼자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서 여러 해 동안 문지기를 탐구하다보니 모피 외투 벼룩에게까지 그를 도와주고 문지기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간청한다. 마침내 그의 시력이 나빠지고, 그는 실제로 주위가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자기를 속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이제 어둠 속에서 법의 문으로부터 꺼지지 않고 비쳐 나오는 한 가닥의 빛을 느끼고 있다. 그는 얼마 살지 못한다. 죽음을 앞둔 그의 머릿속에 오랜 세월 동안의 모든 경험들이 지금까지 문지기에게 해보지 못했던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그는 뻣뻣하게 굳어가는 몸을 더 일으켜 세울 수 없어 문지기에게 눈짓으로 말한다. 두 사람의 큰 차이가 이 남자에게 불리하게 변했기 때문에 문지기는 말할 때 그를 향해 몸을 숙이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 당신은 지금 서 뭘 더 알고 싶은 거요?”라며 문지기가 묻는다. “당신은 참 질긴 사람이군.” “모든 사람들은 법을 얻고자 노력하거늘.”하고 시골 남자가 말한다. “그런데 많은 세월 동안 나 이외의 어떤 사람도 입장허가를 받으려는 사람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문지기는 이 남자에게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눈치 챈다. 그래서 그는 사라져가는 청력에 이르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지정된 것이니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입장허가를 받을 수 없소. 이제 나는 가야하니 문을 닫겠소.”

 

 

프란츠 카프카-단단한 땅에서 배멀미를 앓는 환자

 

해설_ 한석종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는 소설 같지 않은 간단한 이야기다. 표현도 사실적이고 간결하다. 구성과 형식도 단조롭다. 복잡한 사건도 없고 등장인물도 단출하다. 독자들은 어려움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다. 내용도 한가지다. 문지기는 시골남자의 입장이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이야기하면 된다. 그것이 상식이다. 시골남자는 입장이 안 되면 포기하고 그곳을 떠나면 된다. 그것이 일반 사례다. 그러나 이 단편에는 그런 상식이 뒤집어져 있다. 간단히 해결될 일이 내용적으로 꼬이며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사건 같지 않은 사건이 대단한 사건이 된다. 없는 사건이 큰 사건이 되고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된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카프카 문학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해석의 실마리를 암시하거나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흔적을 드러낼 듯 하다가 감추어 버린다. 그의 모든 작품세계에는 목표는 있으나 길이 없다. 그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더 좋은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신화를 만들고 전설을 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는 독자를 우롱하듯 허무와 부조리와 무의미이다. 그는 거짓 세계를 거짓 방식으로 표출시킨다. 결과로 삶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답변을 묵시적으로 던져준다. 수학에서 역逆의 역은 정正이다. 문학에서 보여주는 알레고리다. 카프카의 문학의 특성이다. <법 앞에서> 단편도 같은 맥락이다.

카프카가 스스로 ‘전설’로 부른 단편 <법 앞에서>는 문지기의 모순된 언행과 시골남자의 기이한 헛된 시도가 빚어낸 비극이다. 그들의 대화 중에 특히 “지금은 안 되고 나중에는 가능”하다는 문지기의 구체적 표현 속에 감추어진 의미가 문제의 열쇠다. 문지기는 문을 지키는 수위다. 수위가 어떻게 임의로 지금은 들어갈 수 없고 나중에 가능하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 그는 시골남자의 뇌물을 다 받아 챙기며 “당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받는다며 인간의 갈망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끌리면 내가 금지해도 구애받지 말고 들어가려고 애써보시오”라며 헛된 방황을 부추긴다. 이 입구는 오직 그 남자만을 위해 지정된 것이라면, 이곳의 문은 그 남자의 마지막 생을 위해 지정된 것이라는 뜻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에게 해당되는 문이 있고 법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법을 찾아온 시골남자는 법에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구제를 받기 위해서 온 것일 것이다. 지금은 입장이 안 되지만 나중에 가능하다는 문지기의 이야기를 믿고 기다리다가 결국 ‘법 앞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헛된 노력과 방황 끝에 희망이 좌절된다. ‘법 앞에서’ 구원을 받으려다 ‘법 앞에서’ 죽고 마는 웃지 못할 이로니(Ironie)다. 그 남자는 문지기까지 법 앞에 서게 붙잡아 둔다. 이들은 법의 윤곽을 두 개로 보여준다.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남자의 끝없는 노력, 방황과 좌절과 문지기의 기만, 역설과 거절이 합쳐서 ‘법 앞에서’본 문 안의 법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문 안에 있는 법은 어떤 법인가? 법이 있기나 한 것인가? 모든 것을 우선하는 자연의 법인가, 아니면 생명의 존엄을 지켜주는 생명의 법인가? 정치의 법? 도덕의 법? 무의식의 법? 언어의 법? 가치의 법? 지상에 있는 법이 아니면 ‘지금은 입장이 안 되지만 나중에’ 가능하다고 했으니 죽은 후를 다스리는 내세의 법인가?

모든 사람이 접근 가능한 법이지만 문지기에 의해 차단되어 있고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지만 들어가는 문이 폐쇄되었으며 ‘법 앞에’만 서 있어야할 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법은 과연 법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처럼 법은 스스로 찾는 자를 돕는다는 명제가 적절하다. 그러나 이 명제는 ‘법 앞에서’ 뒤집어진 것이다. 카프카는 그의 일기에서 종종 단단한 대지 위에서 배멀미를 앓고 현기증을 느낀다고 쓰고 있다. 그는 현기증으로 흔들리는 시선으로 세상의 부정, 거짓을 보고 질문하고 고발한다. 비유와 역설과 암시와 상징의 수단으로 거짓 세계를 역으로 꾸며낸다.

카프카의 장편 소설 소송의 제9장 「돔」에서 소송의 주인공 K와 교도소 사제 성직자가 나누는 대화의 내용으로 삽입한 것이 소위 ‘문지기 전설’인 「법 앞에서」 단편이다. 이 이야기는 소송의 핵심 열쇠이며 카프카의 전체 작품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 중의 하나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문지기는 “이 문은 당신을 위해 지정된 것이오.”라는 말과 함께 그곳을 떠난다. 그 남자의 방황은 좌절로 끝나고 구원이 거절된 것이다. 남자가 죽기직전 문 안으로부터 나오는 한 가닥의 빛을 어떤 학자는 구원의 빛이라 해도 임종에 있는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구원의 역설이다. 생전에 거절된 구원의 이로니다. 처참한 죽음을 예고하는 환시에 불과하다. 비슷한 현상을 소설 변신에서 살펴보자. 딱정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세계로 돌아가려는 끝없는 노력과 방황 끝에 비참하게 죽고 만다. 그가 죽은 뒤 오랜만에 집안에 화창한 햇살이 들어오고 그의 여동생 그레테가 그동안 몰라보았던 여성의 성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가족들의 홀가분하고 상쾌한 나들이가 이루어진다. 이 모습이 과연 그 가족에게 내려진 구원의 모습일까? 그것이 또 그레고르의 구원으로 연결될까? 아니다. 그레고르의 죽음의 무의미와 실존적 허무를 돋보이게하는 이로니에 불과하다. 카프카의 모든 주인공들의 비참한 죽음과 말로가 방황, 좌절, 무의미의 실존적 부조리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괴테의 고전주의 작품 <파우스트>에서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여기서 나타난 방황 모티브는 구원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의 방황 모티브는 파멸로 귀결되는 것이 주도 모티브가 되고 있다.

카프카가 ‘전설’이라고 부른 「법 앞에서」를 쓰고 난 뒤에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고 그의 일기에 쓰고 있다(1914. 12월). 그는 도대체 이 이야기의 무엇에 대해 만족했단 말인가? 전설 같지 않은 ‘전설’의 성공적 알레고리에 만족한 것인가? 알레고리의 비밀의 열쇠를 찾으려고 끙끙거리는 전문가, 학자, 독자들의 모습을 보고 껄껄 웃으며 행복해하는 사디스트였던가?

지금까지 여러 각도에서 관찰했지만 이 작품에서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독자도 학자도 심지어 작가까지도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 것이다. 이 ‘전설’은 시공간을 넘어서 틀림없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문지기 전설’인 이 소설을 포함한 모든 카프카 작품의 의미는 다양하고 난해하다. 부조리와 무의미를 포함한 다양한 의미의 진리를 푸는 열쇠는 찾기 어렵다. 역설적 표현으로 카프카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는 자조적 논리가 흥미롭다. 다양한 각도에서 카프카를 해석한 카프카의 학문적 수용사는 오해의 역사가 된 것인가.

 

 

독일 뮌헨 대학,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수학.

경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역임. 전 한국카프카학회장. 전 한국독일어문학회 회장.

카프카의 ≪실종자≫번역 외 카프카에 대한 논문 다수.

현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