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수필가④ | 이어령 편

 

이마를 짚은 손

 

이어령

 

만약에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부러워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줄의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와 악수쯤은 할 것이다. 한 번도 사랑이란 것을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와 차 한 잔쯤은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거짓말도 후회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 시곗바늘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이, 신부 차림의 검은 옷을 입고 내 집 문을 두드린다면 최소한 대문의 그 빗장쯤은 벗겨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감기 한 번 걸려본 일이 없는 사람과는 악수도 차 한 잔도, 그리고 대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일까지도 사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옹졸한 편견을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하나의 방으로, 감기에 걸려 누워 있는 그 병실의 세계로 안내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은폐되어 있던 소리들, 생활의 먼지와 육체의 두꺼운 비계 속에 감춰져 있던 소리들이 마치 의사가 청진기를 대었을 때처럼 우리들의 귓속으로 생생하게 들려올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그리고 방 안에 홀로 누워 있으면 갑작스레 청각이 예민해진다. 거리를 지날 때, 직장에서 때 묻은 서류를 넘기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하기도 하고 눈을 흘기기도 하고 의미 없는 손짓으로 무엇인가 말을 주고받을 때, 그런 때에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소리들이 그 방 속으로 스며 들어온다. 새들이, 참새들이 나뭇가지 위로 옮겨 다니는 그 부드러운 날갯짓 소리와 비밀처럼 내리고 있는 눈발소리와 두꺼운 얼음장 밑을 흘러가는 강물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가 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그 바람들이 북극의 많은 도시들을, 눈 속에 파묻힌 삭막한 대지들을, 낯선 산 이름과 그 많은 강 이름들을 거쳐 온 길고 긴 여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니다. 그런 소리들이 아니다. 옛날에 아주 옛날에 잊어버렸던 음성들, 사라져버린 시간과 함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옛사람들의 여러 가지 소멸한 음성들을 다시 듣는다. 슬픈 음성도, 분노의 음성도. 섭섭하고 부드럽고 안타깝고 야속하고 그렇게 우리들의 생활 속을 흘러갔던 그 음성들이 후회의 한숨처럼 다시 울려온다. 이미 죽은 자의 음성도 있고, 헤어져버린 사람, 의절의 편지와 함께 가버린 사람, 우연한 오해로 이제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낯선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친구들, 그리고 또 이미 아기 어머니가 되어 버린 연인들의 목소리가 있다.

아니다. 그러한 소리들도 아니다. 감기 때문에 최초로 체험하였던 그 자유의 목소리를 듣는다. 38도의 하얀 수은주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두렵고 불안한 것인가를, 그러면서 또 그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배웠다. 출석부의 내 이름에 하나의 사선이 그어질 것이다. 결석한 자리, 나의 의자와 나의 책상은 비어 있을 것이다. 감기는 이등변삼각형보다 더 엄격한 교실 속의 질서에서, 시간표의 질서에서, 식장에서 입는 그 닳고 닳은 교장선생님의 검은 모닝코트와 흰 장갑의 그 질서에서 나를 해방시켜준 자유의 목소리였다. 떨리는 부름소리였다. 범죄자의 소리와도 같고 붉은 혓바닥을 가지고 이브를 꾀어낸 그 뱀의 소리와도 같은 결석의 꿈, 내가 앉아 있지 않은 교실 속의 빈 의자와도 같은 인생의 한 빈터로 감기는 우리의 손목을 끌고 간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감기에 걸리면 결석을 하고, 그 결석의 체험을 통해서, 질서에서 벗어난 불안스러운 인생의 자유를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기를 통해서 우리는 자유의 목소리와 최초의 인사를 나눈다. 감기의 신열은, 체온기의 숫자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생의 흔들림을, 빈 의자의 공허를, 번호가 등록된 출석부의 사선, 고무 같은 것으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그 사선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그러한 흔들림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도 공장이나 서류나 통계표나 규격이 똑같은 아이비엠의 카드나 제복이나 절망적일 정도로 정확한 법조목의 문자들로부터 나 자신을 도피시킬 수 있는 생의 부름소리를, 그 유혹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 목소리가 아니다. 그 소리는 자신의 몸 깊숙이 숨겨져 있는 소리 없는 고요한 내부의 음성이다. 자유라고 이름 지을 수조차 없는 생명의 소리,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평소에는 예지할 수 없었던 심장의 파동소리이며, 손목의 맥박소리이며, 관자놀이가 뛰노는 신경의 소리이다. 그리고 기침소리이다. 폐부를 울리는 기침소리이다. 아무리 정교한 엑스레이 사진도 기침소리만큼 그렇게 선명하게 우리들 자신의 폐부를 겉으로 그려내지는 못할 것이다. 기침소리를 통해서, 두근거리는 자신의 맥박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붉은 피가 묻어 있는 자기 스스로의 폐부와 심장의 존재를 확인한다. 거울을 향해서 자기의 얼굴을 마주 보듯이 기침소리를 통해서 나는 나의 생명과 대면한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기침소리가, 핏방울과 같은 기침소리가 여기 하나의 생명이 있다고, 숨 쉬고 꿈틀거리고 저항하고 있다고 생명을 가로막는 온갖 장벽을 뚫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다. 그러한 모든 소리는 하나의 손이 되어 우리의 이마를 짚는다. 이마를 짚는 손, 우리는 그 손을 기억한다. 어렸을 때에도 어른이 된 후에도 모든 감각이 창문을 닫듯 유폐되어버린 노인이 된 그날에도 우리는 이마를 짚는 손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감기에 걸려 방 안에 누워 있었던 경험이 있다면 이마를 짚는 그 손, 의미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일 수도 있고, 연인들의 손일 수도 있고, 아내의 손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나 혹은 자그마한 자기 아들의 손일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의 신열을 느낄 수가 없다. 가장 분명한 병까지도 자기의 힘만으로는, 그 인식만으로는 잡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타인들의 손이 나의 이마를 짚어줄 때, 그 촉감을 통해서만, 선뜻한 타인의 체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열을 비로소 확인한다. 아, 이마를 짚는 손. 장갑을 벗은 맨손. 그것은 타인의 손이면서도 이미 타인의 것이 아니다. 대체 머리맡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이마에 와 닿는 그 손은, 어머니나 아내의 그 손은, 아니 그 건강한 손들은 나의 감기를 대신 앓아줄 수는 없는 멀고먼 이방인과 다름없는 손들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몸에서는 차가운 바깥공기가 풍겨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내 곁에 있지 않고 건강한 생활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손이 이마에 닿을 때 거리에서 나는 나 스스로의 열을 느낀다. 어렴풋한 황혼의 빛 속에서 어둠과 밝음을 나눌 줄 알고 5월의 바람 속에서 사라져가는 봄과 다가오는 여름의 의미를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마 짚는 그 손과 나 자신의 한계를 뚜렷하게 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손들이 줄곧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환자들처럼, 감기에 걸린 환자들처럼 자신의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마를 짚는 손을 그리워한다. 타인의 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자신의 열기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의 머리맡에 남들이 조용히 착석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싸늘한 손이 이마와 눈과 입술과 그 가슴속에 와 닿기를 기대한다. 그 손의 차가움은 곧 내 이마의 뜨거움이다. 내 입술의 뜨거움은 곧 설목雪木의 가지와도 같은 차가운 그 손가락들이다. 그 접촉의 자리에 너와 내가 착석하는 존재의 빈터가 있다. 너의 건강과 나의 병, 너의 냉기와 나의 열기, 너의 바깥과 나의 방, 그 모순하는 반대어들이 하나의 동의어로 끌어안는 기적의 회랑이 있다. 감기는 이마를 짚는 손이다. 그 존재의 빈터이다. 그 환상의 회랑이다.

 

감기의 바이러스는 용서의 언어, 화해의 언어, 침잠의 언어, 후회의 언어, 자유의 언어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의 언어도, 또 아무리 깊이 있는 사색思索의 언어도, 우리들의 혈관이나 뼛속으로 스며드는 감기의 바이러스처럼 온몸 속에서 꿈틀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감기의 그 미세한 세균들은 온 육체와 신경 속에 침잠하여 잃어버린 나를, 사라져버린 시간들을, 헤어진 이웃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어떤 의학자도, 어떤 약품도 인간의 감기를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다. 인생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한 감기도 또한 우리의 곁에 있다. 때때로 우리는 이 감기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누구는 글을 쓰다가, 누구는 사랑을 하다가, 누구는 지폐장을 헤이다가, 누구는 정치를 하고 기계를 만지고 총기를 소제하다가, 이 감기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땀을 흘리고, 기침을 하고, 이마를 짚는 그 손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잊었던 생활의 벌판들을, 생존의 고향들을 다시 찾게 되리라. 낡은 앨범을 넘기며 사라져간 인간들의 얼굴을 기억해내듯이 기침소리 속에서 잊었던 자신의 폐부와 심장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다. 타인들과 내가 만나는 자리를 확인할 것이다. 결석한 빈자리의 공허한 여백을 확인할 것이다. 새들이, 잔가지 위로 옮겨 앉는 날갯짓 소리를, 많은 도시의 굴뚝을 스쳐 지나온 겨울의 바람소리를, 몰래 내려앉는 눈소리를….

‘그것은 당신의 오해였습니다.’

‘정말 이것으로 마지막인가요?’

‘언젠가 또 만나게 되겠지요.’

‘그렇게 성난 얼굴로 보지 마십시오.’

이러한 마지막 말들의 목소리를, 그 의미를 듣게 될 것이다. 근육 깊숙이 숨겨져 있던, 비계 속에 숨겨져 있던, 그 맥박의 울림 속에서 상실한 많은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감기란 병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은 훨씬 더 황량해졌을 것이다. 감기의 바이러스는 존재의 고향에서 멀어지려는, 타인들의 손에서 떨어지려는 온갖 소리에서 도피하려는, 우리들 역사의 냉랭한 병을 치료하는 역설의 아스피린이다.

 

내가 또 감기에 걸리면 가장 부드러운 융으로 만든 내의를 입을 것이다. 캐시미론 같은 이불이라도 좋으니 그런 가벼운 이불을 덮을 것이다. 머리맡에는 빨간 서너 알의 사과가 아니면 못 먹는 유자나 석류 같은 것을 놓아두리라. 그리고 이마를 짚는 손이 누구의 것이라 하더라도 탓하지는 않겠다. 아무리 밉고 덤덤하고 귀찮은 사람이라 해도 그 손이 열에 들뜬 내 이마를 짚는 선뜻한 촉감에 감사하리라. 눈을 감고 내 심장의 두근대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아직도 이 눈에 뒤덮인 벌판의 한 지역에 살아있음을 나사로가 부활한 그 기쁨으로 맞이할 것이다. 해열제를 준비하듯이 내 이웃과의 새로운 아침인사를 준비해야 될 것이다.

그때, 아무리 선생님이 위엄 섞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해도 교실 속의 빈 의자, 내가 결석한 그 책상에서는 대답이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루한 겨울철이 지나고 감기의 기침소리가 멈추는 새로운 계절이 되면 나는 다시 건강한 몸으로 외출을 해야 된다. 이번만은 좀 더 따뜻하게 좀 더 부드럽게 남과 악수를 할 것이고, 어느 케이크집이나 다방에 들러 슈크림의 생과자가 아니면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셔야 할 것이다. 한약 냄새 같은 온돌방에서 빠져나와 페이브먼트를 걷겠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그 도시의 우울 속을 휘파람 같은 것으로 까불리며 걷겠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악수도, 차 한 잔도, 대문의 빗장 같은 것까지도 열어주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말할 것이다.

“당신의 손은 내 이마를 짚는 손. 당신의 손이 장독처럼 펄펄 끓는 괴로운 내 이마를 짚어줄 때 비로소 나는 당신의 눈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노라”고….

 

 

전 초대 문화부장관, 현 이대 석좌명예교수, 중앙일보 상임고문,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장.

 

 

잃어버린 생을 부르는 소리

 

평설_ 이태동

 

이어령 선생은 그가 쓰고 있는 모자만큼 다재다능多才多能하다. 선생은 프랑스의 앙드레 모루아처럼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문화 행정가일 뿐만 아니라, 문학의 모든 장르를 두루 실험한 예술가이자 평론가이며 언론인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본령은 산문인 수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물론 우상偶像을 파괴하는 비평을 써서 탁월한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를 세상에 더 많이 알린 글은 <흙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에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평적인 시각이 많이 담겨있는 서정적 산문이다. 그의 산문은 비평적인 사유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고, 그의 비평 역시 산문에 나타난 세련된 문학적인 감각이 없으면 다른 비평가들의 글과 차별화 되지 않는다.

이어령 선생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화 분야에서 너무나 혁혁한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수필 분야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쌓은 업적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서정적 산문은 이미 아무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고전古典이 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문학사적으로 그의 수필은 이상(李霜)의 수필 바로 다음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는 문장이나 언어는 물론 주제 면에서 한국 수필을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한 차원 높게 끌어 올렸다. 그는 1960년대 한국 소설에서의 김승옥처럼 산문에서 지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시적인 감각으로 진부하고 무기력함에 빠져 있는 한국어에 생명력 있는 탄력성과 세련된 현대적인 감각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서정적 산문은 그의 문학적 여정의 길에서 초기에만 꽃이 핀 것이 아니다. 2011년인 금년에 그가 출간한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흙속에, 저 바람 속에≫만큼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뒤이어서 발표한 산문집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는 그의 수필의 수준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그의 산문 세계에 있어서 ‘제 4악장’이 되고 있다고 하는 이 책은 시각과 스타일 면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쓴 안톤 슈낙은 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까지 연상시킨다.

이어령 선생을 <이 계절의 수필가>로 모시고 그의 수작 <이마를 짚은 손>을 함께 읽기로 결정한 것은 근자에 쓴 그의 산문을 깊이 있게 읽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함도 되겠지만, 신변잡기身邊雜記유의 산문이 범람하는 우리 수필계의 글쓰기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내일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함이다.

작품 <이마를 짚은 손>은 독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선생의 초기 작품보다 한 차원 더 높이 오른 것 같다. 초기 작품의 언어도 탁월했지만, 이 작품에 사용한 언어는 시적인 조용한 빛을 더하여 한결 더 세련되고 원숙한 느낌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아름다운 언어 자체가 우아한 매력의 힘으로 우리를 미학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문학의 숲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그가 연륜과 함께 쌓아올린 지성과 사고의 깊이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작품이 구도와 수사학은 치밀하면서도 여유로워 단순하면서도 현란하다. 주제 또한 새롭고 참신하면서도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인간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높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마를 짚은 손>은 감기를 앓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작품이다. 감기는 인간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고통의 순간이지만, 이어령 선생에게 그것은 인간을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세계로부터 본질적인 자아의 세계, 즉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경험의 순간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식이 있는 사람은 감기를 앓는 동안 오염되고 혼탁한 경직된 억압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시간의 빈터’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순결한 세계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감기를 앓는 동안 자유가 없는 권태로운 외부세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에서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며 빼앗긴 인간의 향기를 호흡하는 것은 제임스 조이스가 말한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기회다.

그래서 이어령 선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부러워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줄의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와 악수쯤은 할 것이다. 한 번도 사랑이란 것을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와 차 한잔쯤은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도 후회도 해본 적이 없다는 사람, 시곗바늘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이, 신부 차림의 검은 옷을 입고 내 집 문을 두드린다면 최소한 대문의 그 빗장쯤은 벗겨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감기 한 번 걸려본 일이 없는 사람과는 악수도, 그리고 대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일까지도 사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산문이 단순히 ‘자기만의 방’의 풍경을 묘사하는데서 끝난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조용하지만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어령 선생은 소리에 대해 날카로운 감각적 촉수觸手를 통해 울림을 일으키기 위해 저녁의 빛과도 같은 밝음과 어둠을 절묘하게 대조시킨 미학적 공간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나타난 이른바 ‘공감각(synesthesia)’ 의 효과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그의 도움으로 “새들이, 참새들이 나뭇가지 위로 옮겨 다니는 그 부드러운 날갯짓 소리와 비밀처럼 내리고 있는 눈발소리와 두꺼운 얼음장 밑을 흘러가는 강물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우리는 감기를 앓으며 자아를 발견했던 그의 도움으로, “옛날에 아주 옛날에 잊어버렸던 음성들, 사라져버린 시간과 함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옛사람들의 여러 가지 소멸한 음성들을 다시 듣는다.”

슬픈 음성도, 분노의 음성도, 섭섭하고 부드럽고 안타깝고 야속하고 그렇게 우리들의 생활 속으로 흘러갔던 그 음성들이 후회의 한숨처럼 다시 울려온다. 이미 죽은 자의 음성도 있고, 헤어져버린 사람, 의절의 편지와 함께 가버린 사람, 우연한 오해로 이제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낯선 사람처럼 스쳐 가는 친구들, 그리고 또 이미 아기 어머니가 되어 버린 연인들의 목소리가 있다.

 

 

물론 그가 여기서 들려주는 것은 회한과 연민이 있는 우수가 깃든 목소리만이 아니다. 유년 시대에 잃어버렸던 밝고 맑은 ‘자유의 목소리’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렸거나 잊히어진 이 모든 순수한 인간의 목소리의 실체가 감기를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는 손’과 같이 타인을 사랑하는 인간애의 정수로서 그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때 묻은 서류철 사이로 잃어버린 ‘생의 부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작품 <이마를 짚은 손>은 수필이 소설과는 다르지만 얼마나 쓰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오늘날 우리 문단에서 수필 장르를 폄훼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훌륭한 수필은 소설의 줄거리 요약과는 다르다. 수필, 혹은 서정적 산문도 명확한 착상과 철학, 예리한 통찰력, 그리고 끌질을 한 시적인 언어가 없으면 결코 쓸 수 없다.

 

 

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