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덕계 허세욱 선생 1주기 추모문|

 

매화의 향기로

 

박영자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가신지 1주년 미사에 참석해 달라는 사모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모님의 음성은 밝았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감추고 말하는 음성은 밝아서 더 가슴 아픕니다. 웃음 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은 가도 잊히지 않는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선생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던 고백입니다만, 지난 날 저는 부끄럽게도 푼돈에 목숨 걸며 살았습니다. 그래야만 남편의 사업 자금을 마련하고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관용 없는 절대자는 저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갔습니다. 저는 부끄러움에 딸의 죽음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것이 관성이듯이 딸의 이야기를 주위에서 물어 오면 자정이 넘은 시간, 차를 몰고 인천바다에 달려갔습니다. 돌아보면 죽음을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저의 몸부림이 아니었던가합니다. 하늘은 저를 아주 버리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갈 때쯤 충이회를 만나 함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중국문학을 배우려는 노학의 주부들 모임이었지요.

광중으로 내려가는 선생님의 관을 바라보며 저는 죽음이란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순간에 바뀐다는 실체를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믿고 싶지 않았던 죽음의 실체 말입니다. 광중에 백회를 뿌리고 하관을 한 뒤 명정을 관위에 반듯하게 펴서 덮고 광중과 관 사이 공간에 흙을 채워 넣더군요. 세월이 지나 흙이 내려 앉아 관이 해체될 것을 예방하기 위해 석제로 만든 횡대를 덮었습니다. 그때야 저는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며 언젠가는 저도 그 자리에 가야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토록 믿고 싶지 않았던 죽음 말입니다. 원망도 슬픔도 아닌 살아가는 일은 허망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는 매화 밭에서의 일들을 뒤돌아보게 합니다. 비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나간 추억들이 이토록 그리울 줄은 그땐 몰랐습니다.

1999년 2월 충이회 모임에서 중국 남경에 도착해 항주에 간 것이 선생님과의 첫 여행이었지요. 그날도 오늘처럼 고산매화 밭에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쬐끄만한 매화 꽃봉오리가 입을 뾰족이 내밀며 고색창연古色蒼然한 향기로 온 산을 덮었을 때, 선생님과 우리는 나이를 잊고 마치 오창석이 매화를 사랑해 무원蕪園이라 이름을 짓고 누각 뒤에 매화 30여 종을 심어 매화에 취해 살았다는 문인처럼 한매寒梅에 취해 이리 저리 뛰어 다녔지요. 참 매화는 꽃잎을 아래로 숙이는 것이며, 그런 매화라야 진정한 향기를 맡게 된다고 합니다. 중국의 많은 시인 중에서도 소동파와 임포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해 주신 것은 두 사람이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합니다. 선생님을 기리며 제자들이 쓴 '버팀목'이라는 책속에는 선생님이 배꽃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뵈었던 선생님은 배꽃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 커피타임을 가질 때에도 선생님의 모습은 언제나 근엄하고 엄숙해 근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매화 밭에서 아이 같았던 선생님을 뵈온 뒤부터 저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걱정거리와 해묵은 일들을 털어 놓았지요. 그러나 선생님은 어떤 해답도 주지 않고 듣기만 하셨습니다.

시와 수필 원고를 쓰시고 제자들에 대한 배려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고, 강의와 번역, 초빙교수로 한국과 중국을 다녀오며 바쁘게 시공을 넘나들던 선생님은 정작, 선생님 자신에게는 소홀하셨습니다.

입원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아 물어물어 찾아뵙던 선생님의 모습은 강의실에서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수술을 할 수도 있을지 몰라.” 혼잣말처럼 뇌이며 침대에 몸을 누이던 선생님은 끝내 기운을 잃으셨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었더라도 이토록 애통해하며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상의 누운 시간과 소천은 너무도 순식간이었습니다.

후스(胡適)에게는 차부뛰(差不多) 선생이 있고 루쉰(魯迅)에게는 후지노(藤野) 선생이 있었지만, 스승으로 모시기엔 그분들보다 더 버금가는 스승을 모신 제자들은 참으로 복이 많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백 명이 넘는 교수 제자를 만드신 선생님께 저희는 감희 제자라는 말은 올릴 수 없으나, 10년이 넘는 세월을 선생님과 함께하며 중국의 시인묵객을 찾아 여행을 다녔으니 여우旅友로라도 불러 달라고 떼를 쓰고 싶습니다.

학술적인 공부는 닿지 못해도 선생님의 인품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말없는 가르침, 머리로 지식을 배우는 것은 노력으로 될 수 있으나 가슴으로 선행을 하는 것은 평생을 해도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탯줄처럼 자리 잡은 곳이기에 외국어대학에 일 억이라는 거금을 내놓으신 처사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님을 압니다.

사람은 떠나야 더 그리워진다는 말 때문일까요? 황산을 가는 길에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껍질을 길에 뱉고 가는 여인에게 다가가 자상한 어투로 길을 묻던 모습이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떠오릅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인솔이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이에 걸맞게 가는 곳마다 메모를 하고 다니며 행여 여행에서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노생老生들은 몰랐습니다. 다녀와 책을 낸다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겼지요. 우리의 책이 규장각에 비치되어 있음도 선생님의 발문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은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떠남을 미리 준비하느라 그토록 서두르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기행문에 써 주신 발문을 다시 읽어 봅니다.

 

“나이가 부끄러울 때부터 나는 삶과 죽음을 함께 볼만한 곳이 없을까 하였다. 그럴 때면 만경강둑에 서서 지평선에 도사리고 있는 영원을 사랑했다.……

내 어릴 적 소원은 땅 끝 벼랑에 서보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영원이라는 것을 한번 볼 수 없을까 하고, 그때부터 무한(無限)을 보는 것으로 일종의 믿음을 대신하였다. 저 끝나지 않는 선을 보고 끝까지 걸어가면 어느 때인가 영원 곁에 다가 서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위안을 받곤 했다. ……

길을 보면 걷고 싶다. 가다보면 길이 끝나는 곳까지 걷고 싶다. 이 땅의 시종이 알고픈 것이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는 걸까? 살다보면 내가 서 있는 시간이 어디쯤일까? 마찬가지로 시간의 시종을 알고픈 것이다. 언제 시작해서 언제까지 가는 걸까? 영원의 형상은 무한이고 영원의 색깔은 하늘빛이거나 땅 빛인 것을….”

 

미사가 끝났습니다. 이제는 선생님을 잊어야겠습니다. 선생님은 떠난 것이 아니라 저희들 마음속에 매화 향기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수필공원≫으로 등단. 수필집≪한 장의 흑백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