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선정은

 

젊은 군인이 다음 역에서 내리자 옆자리가 비었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통로에서 멈칫거리더니 옆에 앉는다. 수녀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작은 키의 수녀는 어딘가 출장을 가는 듯 끄는 가방과 메는 가방을 갖고 있다. 그것들을 선반에 올리지 않고 앞에 놓는다.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네는 게 나을까 침묵하는 게 나을까 짧게 생각하다가 침묵하는 게 그녀를 도와주는 거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으므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신문만 보며 갔는데 그녀가 나의 의도를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성호를 긋더니 작은 가방 옆구리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붙였고, 점심때가 되었고, 가방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 때문이라지만 음식을 먹으면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먹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자 불편했다. 잠시 후 수녀도 뭔가를 먹기 시작했다.

그녀와 얘기를 텄더라면…. 매년 6월 지리산 종주를 한다는 얘기며, 삶의 시프트를 도모하는 방안이 뭘까 고심하다 조우한 선禪을 주제로 얘기를 이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간의 수행을 점검받는, 다음 주의 최종캠프 입소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도 고백했을 것이다.

그녀는 뭐라고 했을까. 모두 다 주님의 뜻 안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랬을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세요, 그랬을까.

뙤약볕이 내리꽂히는 한적한 시골 역에 무거운 등산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혼자 내려 멀어져가는 기차를 보다가 천천히 개찰구로 다가갔다.

 

삼도봉에서 연하천으로 가는 길.

헉헉대며 걷는데 앞에 젊은 여성이 혼자 가고 있다. 발자국 소리를 듣고 길섶으로 비켜서며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다. 여학생이다. 나도 인사를 하고 한참 가다 언뜻 보니 쭈그려 앉아 뭔가 사진을 찍고 있다.

다음 대피소에 닿은 건 정오 무렵, 그늘진 나무 밑 의자와 탁자에는 선착 객들이 앉아 시끌벅적 유쾌했다. 생수통에 물을 받아 채우고 샘 옆 뜨거운 나무 벤치에 짐을 부렸다. 햇볕 아래 앉아 몸에 영양분이 필요해서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는 기분으로 빵을 씹고 있는데 아까 본 그 여학생이 이제 막 도착했는지 샘터에 왔다가 남아 있는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알은 체 하려다 그만두었다.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친구와 대화하는 듯 했다. 그런데, 그녀 옆에 친구는 없다.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니다. 여학생은 마치 누구와 전화하듯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다.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은 여학생이 다리를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누군가 와서 그녀에게 캔을 내밀며 말을 건다.

대학생인가?

아니에요, 고등학생이에요.

여학생이 웃으며 대답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 길을 걸었지만 이런 여학생을 만난 건 처음이다. 속이 더부룩하고 닝닝해 왔다. 말을 건네 볼까 하다가 배낭을 멨다.

야영하기로 예정한 대피소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신발을 풀었다.

새벽부터 11시간을 혹사당한 발의 표정이 처참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했으나 발에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은 듯했다. 두 엄지발가락은 그날 이후 한 달째 혼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침낭 속에서 별빛을 보며 무리한 산행은 자랑이 아니라 자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진단을 병원에서 받지 않고 산에서 받는다고, 교만한 소리를 해왔던 것이다. 집착 가득한 산행은 무분별이다. 탐욕에 다름 아니다.

내년부터 이 무리한 산행을 자제하게 될 것 같은 생각에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 날, 다시 오기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스쳐 지나던 쓰레기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고 쓰레기들을 주우며 걷자 시간이 꽤 지체되었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정상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법계사.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이 절에 들러 기와불사에 작은 성의를 보태고 생수통에 물을 채우고 나니 하산 길도 한결 상쾌해졌다.

 

중산리에서 진주로 나가는 완행버스.

맨 앞자리에서 모처럼 한유를 즐기는데, 정류소마다 시골 분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배낭을 안고 창 쪽으로 붙어 앉자 한 아주머니가 미안합니다, 하며 앉았다. 미안할 게 뭐란 말인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분을 보며 말했다.

아주머니라 할까 할머니라 할까 애매한 분이다. 화장 같은 건 30년 전에나 해봤을까싶게 검고 주름진 얼굴. 코 밑에는 잔털 같은 수염까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왼손이 없다. 팔꿈치와 팔목의 중간 부분 이하가 없다. 내 옷차림을 보고 그녀가 물었다.

산에 갔다 와요.

예, 지리산에….

독새 조심해야 돼요, 독새.

독새…. 아, 독사요, 뱀….

그녀는 풀숲에서 쉴 때 독사에 물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풀밭에서 소변을 보다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멀리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릴 때까지 쉼 없이 얘기를 했다. 구랭이 술을 담갔는데 닷새도 안 돼 아저씨(남편)가 장에 갖고 나가 팔아먹은 얘기며, 백사 술도 담갔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창원 사는 작은 아버지에게 선심써버린 얘기 등. 내리기 얼마 전 아주머니는 내게 솔방울 술이 간에 좋다며 만드는 법을 진지하게 설명했다.

다른 데 엿치 말고 꿀 병에다 여야 돼. 설탕 엿치 말고.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자신의 비방을 선뜻 일러주는 분위기였다. 그녀가 내릴 때 용돈을 좀 쥐어드리는 게 어떨까 잠깐 생각했지만 실행하진 못했다.

나는 이 결핍 있는 아주머니가 왜 그리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지 곰곰 생각했다.

문득 그가 보살이 아닐까 생각했다.

1주일 후, 수행 점검을 위한 캠프 입실을 자진 사양했다.

선지식善知識이 준 화두를 품고 백이십 리 준령을 걸었지만 은산철벽은 문을 열지 않았다. 마음의 눈을 뜨는 일, 색계에서 무색계로 가는 길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행이, 공력이 아직 모자랐다.

 

 

≪계간수필≫로 등단. KBS 사우회 편집인. 계수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