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말을 하다

 

구민정

 

는개 내리는 강변, 한 폭의 풍경 속으로 든다. 퇴촌의 한 모롱이 조붓한 샛길 돌아들면 스튜디오 ‘시안’이 있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흰여울 따라 봄꽃 함초롬한 야외정원, 마치 동화 속 나라에 온 듯 발걸음이 해깝다.

은혼식을 앞두고 큰아이가 웨딩촬영을 예약해 두었던 모양인데, 아침에야 사실을 알려와 사뭇 설레는 맘으로 예까지 왔다. 스튜디오 직원이 안내해 준 방으로 든다. 복도 끝 깊은 방, 사방 거울 앞에 의자가 놓여 있고 그곳에 조명이 집중되어 있다. 내가 의자에 앉자, 실장이라는 여자가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선 그림 그릴 채비를 한다.

“진하지 않게 해주세요. 소녀처럼….”

흘린 말꼬리를 알아들었는지 여자가 씩- 웃는다. ‘반백의 나이에 소녀의 모습을 꿈꾸는 것이 가당치 않지’, 칙칙한 민낯이 맘에 들지 않아 얼른 눈 감아버린다. 여자의 손길이 속도를 타기 시작한다.

청담동에 있다는 스튜디오의 분점을 이곳에 열게 되면서 고객들이 선호한다며 주변의 볼거리, 먹을거리까지 곰살맞게 설명해주는 여자, 어쩌면 이곳 주변에 관해선 여자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곳에 오면 실없이 강변을 배회하기도 하고 맞은편 얼굴박물관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한다. 인근에 두 아이가 잠들어 있고 지난 주엔 아들 기일이라 다녀갔지만, 봄의 정취 느끼기 좋은 곳에 딸아이가 마음 모아 마련해준 자리이니만큼 내색 않고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기로 한다.

그림은 계속된다. 얼굴 덧칠을 할수록 모습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남편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무미건조한 걱정을 해보는데, 여자가 손거울을 내 손에 쥐어준다.

거울 앞에 낯선 내가 앉아 있다. 하얀 가면을 쓴 모습, 이건 필시 분장이다. 하얀 가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웨딩촬영을 시작한다. 모델출신이었다는 스튜디오 사장이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 중년의 신랑신부는 그 포즈를 따라하다 서로의 모양새가 어색하여 웃음이 터진다. 그 순간을 포착하느라 카메라 셔터 소리 분주하다. 이벤트를 앞두고 비 소식에 걱정하던 딸까지 웨딩드레스를 입게 하여 거실에 걸어 둘 가족사진 한 장도 오붓하게 남겼다.

일이 끝날 즈음, 하늘이 활짝 열려 융단처럼 햇살 드리운 길을 딸과 함께 걷는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봄날 천천히 지르밟는다.

 

집에 돌아와 한참을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어디부터 지울까,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화장대 서랍 안에 넣어둔 거울 생각이 났다. 한쪽 면이 확대경인 거울을 꺼내든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몇 해 전까지 논술수업 시간이면 학생들과 함께 거울보기를 했다. ‘자화상 그리고 십계명 세우기’, 수업 주제는 그들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내게 주어지는 목표이기도 했다. 학생들 나이 즈음, 웃는 모습이 해맑아 ‘천사’란 별명으로 불리던 내가 마흔 줄에 그들과 함께 얼굴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홀연 아들이 떠나면서 예전처럼 애써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벼랑 끝 외줄로 버티던 아이, 그래서 삶은 더 치열해야 했으므로.

그러던 한 날, 중국에 다녀오신 H교수님이 내 앞에 무언가를 밀어놓으며 챙겨 넣을 것을 채근하셨다. 거울 표면에 한시가 새겨진 나무재질의 하트모양 손거울이었다. 얼떨결에 그 물건을 받아 가방에 며칠인가 넣고 다니다가 화장대 서랍에 고이 넣어 두었다. 교수님 떠나신 후, 어느 날인가 새삼 거울의 의미를 되새긴다. 늘 염려해 주시던 그 분의 격려, 거울 선물 또한 그런 의미란 걸 안다.

퇴촌 가는 날이면, 얼굴들이 주술처럼 발길을 불러들인다. 얼굴박물관, 그곳에서 수십 년 내지는 세기를 거슬러 올라 시공간을 초월한 옛사람과 조우한다. 문인으로 문관으로, 고위공직자로 평범한 서민으로 굴곡의 세월을 살다간 이들의 얼굴을 본다.

‘얼굴에 그 사람의 정신사가 담겨 있다’는 미국의 사상가 에이모스 브론슨 올컷의 말처럼 얼굴은 생각이 머무는 곳, 얼이 깃든 굴이다. 한 얼굴에 어린 무수한 얼의 꼴, 빼곡한 사연을 발설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참 지켜보는데, 가만 그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 눈빛으로 자네 모습을 바라보게나.”

깊은 잠에 든 나를 깨우는 소리. 귀에 익은 낯익은 음성, 함께 묻어온다. 산다는 것은 무수한 얼굴과 만남이라던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내 얼굴 그림도 풍성할 수 있을 것이나, 여러 해 관계의 단절 속에 거울 보는 일도 얼굴 그리는 일도 무심했다.

사춘기 즈음부터 그려온 내 얼굴 그림은 인생의 어느 정점에서 다행히 완성이 되거나 아니면 미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내 얼굴 그림은 한 번에 완성되기보다, 거울보기를 통하여 잘못 그려진 빗금 다시 새겨가는 삶의 빗금질이다. 그윽한 향기 묻어나는 얼의 골짜기에 세월 걸어 두고 조금씩 채워 가는 한 장의 풍경처럼.

 

 

≪계간수필≫로 등단(2003년),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토방] 동인.

≪빈혈로 흘러내리는 달빛≫등 공저. 계수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