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박현정

 

절대왕정 아래서 배고픔에 허덕이던 민중은 드디어 프랑스혁명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다. 이어 태양왕 루이 14세가 남긴 베르사유 궁에서 지내던 국왕 일가를 파리로 천도시킨다. 혁명이 장기화되는 상황에 불안해진 국왕 일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고국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늦어버린 탈출 시기와 떠나는 과정에서 지체된 시간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군과의 약속이 어긋나버린다. 국왕 일가가 벌인 5일 동안의 도피 행각은 실패하고 바렌느 도피 사건으로 알려진다. 분노에 찬 군중의 시선을 받으며 그들이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아직 젊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름답던 갈색머리는 노파의 백발로 변해있었다.

오래 전 학동들이 처음 한문을 배울 때 보는 천자문은 백수문이라고도 한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자문을 지은 저자는 젊은 나이에 황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다. 위대한 시인으로 이름이 높은 저자를 아끼던 백성들은 그를 살려 달라 왕에게 간청한다. 이에 왕은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천 개의 글자를 가지고 하룻밤 사이에 훌륭한 시를 지으면 살려주겠노라고 제안한다. 다음날 아침 젊은 시인이 천자문을 가지고 황제 앞에 섰을 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목숨이 걸린 과제에 매달린 하룻밤 동안 그의 머리가 백발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내가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머리숱이 적어져 애를 태운 탓이다. 적어지는 머리카락 때문에 어찌나 심려했는지 그 마음 씀이 더 괴로웠다. 병원에 다니며 검사를 하고 이런저런 치료를 받으면서 약을 발랐다. 두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식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가 농사지어 재배한 사람에게 구입하여, 아홉 번 쪄서 말려준 검은 깨와 검은 콩이 생각난다. 냉장고에 가득하던 연근, 칡뿌리 즙들은 미처 먹지 못하고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내 상황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면서 적은 머리숱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좀 놓여났나 싶더니 타인의 눈에 먼저 보이는 흰 머리카락이 당황스럽다.

머릿결이나 머리 모양은 외모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여성들이 많이 신경 쓰는 부분이다. 긴 머리를 앙증맞게 정돈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었을 어른의 손길을 느낀다. 딸의 머리를 빗겨주며 자기 머리 손질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딸의 여성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태도이며 여자 됨을 축하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동화 속에서 백설공주가 하얀 피부와 고전적인 드레스로 승부한다면, 라푼첼은 길고 탐스러운 금발을 자랑한다. 그녀가 사는 높은 탑 안으로 들어갈 문을 찾지 못한 연인은, 라푼첼이 빗어 내린 황금빛 머리카락에 의지해 탑으로 올라와 사랑을 나눈다.

남성에게도 머리카락은 힘과 매력의 원천이 된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흠이 없는 완벽한 외모로 칭찬받는 인물이다. 그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준수한 용모의 왕자이다. 왕위 승계 문제로 다투는 싸움에서 압살롬의 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던 다윗의 마음과 다르게, 압살롬은 그만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걸리는 불운을 당한다. 사슴의 머리에 난 아름다운 뿔이

 

도망치는 발길을 더디게 하듯,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지체하는 사이 그의 심장은 정적의 칼을 맞는다.

남들보다 적은 머리숱 때문에 잠 못 이루던 때의 나는 어려운 현재에도 나름 꿈이 있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머리카락의 상태도 걱정이지만, 앞으로 머리숱이 더 적어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컸다. 내가 도달할 어느 미래에 머리숱이 주는 결핍으로 어떤 장애가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더 근심에 싸이게 한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어언 순간 적은 머리숱에 담담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꿈이 줄어들고 두려움도 엷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먼 미래의 꿈이 스러지면서 나를 애태우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삶은 한 순간을 사는 것이지 싶다.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이 단 하루치만의 식량을 허락하듯이. 한 번에 하나를 살다보면, 하나하나가 모이고 쌓여 나를 만들고, 그 하나들이 어느 순간 힘이 되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며칠 동안 첼로 연습을 못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중에 그동안 못한 것까지 몽땅 하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되지 않는다. 못한 것은 그대로 지나가 버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하루치만 연습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당시 어머니로 성숙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보다 아이들을 위해살고 싶었을 것이다. 극도의 공포를 경험하고 아이들까지 잃은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더 이상 젊지 않은 여인으로 죽는다. 천자문을 지은 저자의 개인 정보는 모르지만, 그가 젊고 재주 있는 시인인 만큼 오만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죽음과 투쟁을 벌인 하룻밤 사이에 시인이 잃은 것은 검은 머리카락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한 번에 하나를 사는 겸손을 배웠을지도 모르는 시인은 더 이상 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반면

 

준수한 왕자 압살롬은 다가오는 죽음에 떨릴 사이도 없이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간직한 채 숨이 멎는다. 두려움과 나이 듦에 퇴색하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은 죽음으로써 젊음의 오만한 꿈을 완성한다.

 

 

원광대 독문과 졸업, ≪계간수필≫로 등단(1999), 계수회 회원

공저 ≪다음 페이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