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길에서

 

변해명

 

추석을 앞두고 가족들과 함께 어머니 묘소를 찾았다. 금년 장마는 너무 심해서 혹시 묘소에 흙이라도 씻겨 내려가지 않았나 살필 겸 해서다.

포천을 지나 일동으로 가는 어디 쯤 천주교 묘소 평화묘원이다. 그 곳을 묘소로 만들 때 만드는 쪽에서 돈이 부족하여 미리 묘소를 판 일이 있는데 우리가 가족묘처럼 여러 기를 사 두어 그 한 자락이 가족묘와 같은 인상을 준다.

천주교에서는 돌아가시는 분들의 순서로 묘 자리를 내어주는데, 우리는 한 곳에 5기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 곁에 언니, 언니 곁에 내 자리, 그 곁에 동생 등 어머니 묘 곁에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처음에는 내 묘 자리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 싫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주 그곳에 가니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이다.

내 가묘에 풀을 내가 뽑는다. 풀을 뽑으며 까뮈의 에세이 <안과 겉>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가난한 노파에게 한 일가 언니가 유산을 남겨준다. 그 돈으로 노파는 자신이 묻힐 묘지를 사는데(남이 쓰던 동굴 같은 묘지로 나옴) 그것이 너무 좋아 매일 그곳에 와서 안팎을 다듬고, 묘혈 속을 정리시키고, 자기 자신의 육체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다. 그리고 금으로 된 대문자로 자기 이름을 새기기까지 했다.

그 노파는 자기 무덤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히게 되어 일요일 오후마다 묘지가 있는 마을 초입까지 이어지는 긴 길을 걸어가곤 했었다. 그 조그만 지하 매장실에 들어가서는 조심스레 문을 닫고 기도대 위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어느 날에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자기는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만성절萬聖節에 어느 때보다 늦게 닿은 그 여자는 오랭캐꽃이 경건하게 문턱에 뿌려진 것을 발견하였다. 갸륵한 친절로, 꽃 없는 무덤 앞에서 동정심 있는 어느 이름 모를 사람들이 자기들의 꽃을 나누어 홀로 버려진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을 경배했던 것이다.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노파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꿰뚫어 본 것이고, 그 노파를 지켜보는 이웃은 그를 죽은 사람으로 인정해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면 삶과 죽음을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의미로 의식하게 되는 가보다.

그 많은 묘지들을 내려다본다.

넓은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모두 메운 그 많은 쉼터는 군인들 열병식 하듯 질서정연하게 층계를 타고 늘어서 있는데, 그 많은 쉼터의 주인공들이 살아서는 모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라고 얼굴들을 든다.

지금 나처럼 돌아가신 분들을 향해 남의 집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나도 언젠가는 이 자리에 누워 세상을 보겠지. 레테에 강을 건너면 이승을 보지 못하고 잊는다는데 그러면 무엇이 되어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정들었던 세상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간은 달음질치고 몇 번이나 이곳에 와서 <안과 겉>의 노파처럼 내 무덤의 풀을 어루만질 수 있을지.

어머니 성묘는 그런 하루였다.

 

 

전 부평서여중교장. ≪한국문학≫으로 등단(75년)

현대수필문학상 수상(89년). 수필집 ≪숨겨진 시간의 지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