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과 잘 쓴 글

 

백임현

 

최근 어느 화가의 산문집을 읽었다. 가을 한 달 간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도보로 여행하면서 곳곳의 풍경과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일화들을 세세하게 적은 일기 형식의 글이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거의 매 쪽 마다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 독자는 필자가 거쳐 간 여정을 함께 동행한 것처럼 사실적인 필치로 실감나게 적고 있었다.

필자는 그 동안 십여 권 가까운 여행기를 펴낼 만큼 필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전문 문필가가 아니기 때문에 문장이 가다듬어 있지도 않았고 작품성 있게 글을 잘 쓰지도 않았다. 전혀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말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적어 놓고 있었다. 상당한 지식인이었음에도 미숙할 정도로 글이 소박하고 거칠고 너무 솔직하다 못해 독자를 당황스럽게 할 때도 있었다. 수필에서 요구되는 격조다 품격이다 하는 문제는 일체 개의하지 않고 어수룩한 구어체의 문장으로 여행지의 경험을 그림 설명하듯이 사실 그대로 쓰고 있을 뿐이었다. 글이 이러면 되지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소탈한 글 속에 예술가의 시각이 있었고,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진실이 있었다. 다만 그것을 꾸밈없이 썼을 뿐이다.

이제껏 잘 다듬어진 글에만 익숙해 온 눈에 멋대로 쓴 것 같은 거친 글은 신선하고 새로웠다. 그것은 마치 인공적인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싱그러운 숲을 보는 듯 생명감이 있었다. 또한 허세 없이 글이 쉽고 편안하여 읽는데 부담이 없고 아무 때나 펼쳐 읽어도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듯 친밀감이 있었다. 쉽고 재미있고 그러면서 감동도 있고….

아, 나도 앞으로 이렇게 글을 써야겠구나 생각하면서 틈틈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런데 후반부가 되면서 글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은연중에 화려한 수사가 등장하면서 문장에 미문이 섞이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글이 세련돼 가고 있었다. ‘이 사람 글을 많이 쓰더니 저절로 연마가 되어 이렇게 표현이 풍부해지는구나, 처음에는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내용이 계속되자 어쩐지 흥미가 없어지면서 책을 덮고 싶었다. 문맥상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쑥불쑥 나타나는 관념적 사유와 유창한 문장, 어느 새 처음의 신선감은 반감되고 자연미를 상실한 분재나 인공적으로 정돈된 조경을 보는 것처럼 생명감을 잃어버린 글은 개성도 진실도 없었다. 글을 잘 써 보려고 애써 다듬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것은 그의 문체와 어울리지 않았고, 문맥상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내용은 풍부해지지 않았는데 표현만 풍부하게 분식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왜 이러는가. 이건 정말 아닌데 왜 갑자기 잘 쓰고 싶었을까.” 욕심이 좋은 글을 훼손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글을 쓰던 초기에는 다채로운 수식어를 동원해서 화려하게 쓴 글이나 추상적인 관념어를 섞어 어렵게 쓴 글을 읽으면 대단히 유식하고 멋있어 보였고 그것이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글이 아니라 글에 대한 허영이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좋은 글이란 잘 쓰려고 꾸민 글이 아니라 서툰 솜씨라도 자기 능력껏 진실을 정직하게 쓴 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무지한 촌부(村婦)의 일기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글을 잘 써서가 아니고, 초등학생의 작문이 어른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툰 문장이지만 진실이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글은 조미료가 안 들어 간 음식처럼 덤덤하고 싱겁다. 그러나 오래가도 식상하지 않고 은근한 맛으로 가슴에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원로 분들의 글이 대개 다 그렇고 수백 년 고전으로 남은 글들이 대부분 그렇다.

나는 내 초기의 글쓰기를 생각하면서 잠시 밀어 두었던 그의 여행기를 다시 폈다. 책이 끝나기 전에 필자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애정에서였다. 다행히도 끝부분에서는 처음처럼 순수한 그의 개성을 다시 회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저자는 서툰 글쟁이였으나 진실한 글이 좋은 글임을 아는 훌륭한 작가였다. 이 가을 나는 좋은 책을 읽었다.

 

 

≪동서문학≫으로 등단(87년).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놓치고 사는 기쁨≫ ≪아침 소리≫ ≪강촌에 가고 싶다 100인선≫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