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정충영

 

아득한 수평선은 가슴 가득히 밀려드는 동경이 출항할 출발선이었다.

마을길을 빠져나와 논과 밭두렁을 지나면 해풍을 받아 이리저리 굽은 해송 숲의 솔향기가 상큼하고 분홍빛 해당화가 맵싸한 향기를 풍기는 솔무 등이 나타났다. 바다와 들판 사이를 경계 지어주는 야트막한 모래 동산, 그 너머론 드넓은 바다가 출렁대고 있었다. 언젠가는 수평선 너머 미지의 이국 도시로 떠나리라 꿈꾸며 솔무등 흰 모래밭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먼 바다에 떠있는 검은 선박과 햇빛에 반짝이는 푸른 물결은 망망대해 고도에 표류해온 어린 소녀를 미래로 데려가는 이정표 같은 풍경이었다.

전쟁을 피해 찾아든 섬, 증동리는 먹을 물을 긷기 위해 우물바닥을 긁어 퍼 올린 물을 항아리에 가라앉혀 먹는 물이 귀한 섬이었다. 논과 밭에선 벼, 보리, 밀, 목화, 고구마, 배추. 무 등 온갖 농산물이 자라고 바다에는 민어, 굴, 대합, 게, 낙지, 운저리(망둥이), 짱뚱어, 파래 같은 신선한 해산물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섬을 둘러 싼 산에선 고사리며 도라지를 캐고 분홍색 진달래를 꺾기도 했다. 답답하지만 풍요롭던 그 작은 섬은 어린 내겐 소풍 나온 별천지였으나 도시인인 엄마에겐 불편한 벽향(僻鄕)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이 섬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엄마의 꿈이었으리라.

“여기서 그냥 저렇게 살래?” 내 표정을 살피며 엄마가 묻자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바다낚시를 즐기며 이 바닷가 마을에 머물고 싶었으리라.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정리해 서울로 떠났다. 세월이 흐른 후 돌아보니 그 곳은 다시 그리운 고향으로 마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다도해 가운데 수려한 섬 증도(曾島)는 초원의 빛과 푸른 바닷바람에 휩싸여 세상의 소란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호롱불 밑에서 책을 읽고 매캐한 모깃불 곁 멍석에 누워 별을 보던 전설 같은 그곳을 나는 왜 벗어나고 싶어 했던지.

지금은 아시아의 슬로우 시티로 지정받아 엘도라도라는 근사한 리조트 호텔까지 해변에 들어선 섬, 양수기로 바닷물을 퍼 올려 햇볕에 말리면 하얗게 영글던 소금들의 반짝임, 아버지의 소금밭이 있던 갯벌에는 이제는 기업화된 대형 염전이 들어서서 최고 품질의 소금을 생산해낸다.

3학년 때 편입해 졸업할 때까지 다녔던 그 섬의 유일한 학교, 증도 초등학교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가을동화 같이 향수어린 풍경 속에 선 진갈색 목조건물이었다. 아카시아 나무가 둘러 선 운동장 가에는 철봉대와 그네가 있어 늘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그 언덕 앞쪽으로는 잔잔한 바다가 내리 쬐는 햇살을 반사해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운동장가에 서면 바다 멀리 내려다보이던 도덕도는 방축리 앞바다 거센 물살이 흐르는 지점에 떠있는 검푸른 숲으로 뒤덮인 작은 무인도다. 여름이면 썰물 때 얕아진 그 근처 바닷물 속에 들어가 시원하게 물장구를 치며 놀곤 했다.

“옛날에 여기서 큰 배가 꺼퍼져서(침몰해서) 지금도 기름이 떠다닌대.” 한 친구가 말했다. 신기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무지갯빛 기름을 찾아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 위를 살펴보았지만 푸른 물은 맑기만 했다.

이 마을에 600여년이 넘게 구전되어 오던 난파선에 관한 풍설은 1976년 한 어부의 그물에 걸려 나온 청자화병 한 개가 단초가 되어 사실로 드러났다. 그렇게 해서 중국 송,원대의 유물이 가득 실린 ‘신안 해저 보물선’이 발견된 도덕도 앞바다, 그 해변 쪽으로 뻗어간 언덕에는 신안 보물선 발굴 기념탑이 서고 섬을 일주하는 자동차도로도 생겼다.

새벽마다 장 닭들이 힘차게 날아올라 용마루 위에서 홰를 치며 ‘꼬끼오’ 외치던 정겹던 초가지붕들. 이제는 다 기와나 함석, 슬레이트로 바뀌어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어져 더 이상 전원적인 섬은 아니다. 연륙교로 지도(智島)와 연결되어 목포까지 한 시간 걸리니 섬과 섬 사이를 발동선을 타고 항해하던 다섯 시간의 바다 길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언젠가 어릴 적에 함께 바다에서 첨벙대던 그리운 사람들이 다 사라져버린 그 섬을 찾았을 때, 원시적 자연이 아름답던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나는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떠나고 싶었던 아버지의 본향에 수십 년이 흐른 후 다시 서니, 문명의 파고가 덮쳐버린 어정쩡한 변모에 허망한 마음이 망연할 뿐. 객사에 누워 창밖으로 밤하늘을 쳐다보니 그 옛날 30대 후반이던 어머니의 기막힘이 또렷하게 느껴져 가슴이 저려왔다.

미래지향적이면서 과거지향적인 ‘언젠가’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 단어다.

마음의 녹음테이프에 기록된 과거와 멀리서 손짓하는 희망을 눈앞에 불러내기 위해선 언젠가라는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되었다.

언젠가는 소울 메이트를 만나 이니스프리의 호반(이상향)으로 가리라, 근심 걱정 없는 햇빛 밝은 땅에 다다르리라 생각하며 가슴 두근거리던 시기, 캄캄한 밤에도 동트는 새벽을 느끼며 힘이 솟던 시절, 가보지 못한 넓은 세상이 신기루처럼 나를 유혹했다. 안개 속을 헤매듯이 ‘언젠가’라는 언어의 힘에 의지해 삶의 바다를 항해했다. 먼 나라의 도시와 시골, 바다와 산, 마음속에 그리던 낯선 땅에서 살아도 보고 여행도 했다. 가고 싶던 미지의 땅에 머물던 어느 날 부딪치게 된 쓸쓸함을 잊게 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마음의 행로에서 만날 수 있는 지난 날 언젠가의 장면들이었다. 지독히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들과 풍경들의 기억은 잃어버린 유토피아가 되어 나를 어루만졌다. 버리고 떠나온 과거가 미래의 서름한 지점에 섰을 때 그리운 옛날이 되어 환영처럼 피어올랐다.

언제부턴가 뇌리에서 ‘언젠가’ 라는 단어를 지우려고 애쓴다. 모든 것은 현재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른다.

“행복이란 한 마리 나비와 같다. 잡으려고 쫓아가면 항상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조용히 앉아있으면 네게 살그머니 내려앉을 것이다.” 나타니엘 호손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젊은 날엔 수용할 수 없었던 이 말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따를 수 있게 된 것은 노년기의 축복인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말 ‘언젠가’를 잊어버리고 이제 우리들은 ‘오늘’이 최후의 선물인 것처럼 그렇게 살자며 웃는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한국일보 기자역임

≪한국산문≫(2009년)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