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66회|

 

 

박완서의 <엄마의 마지막 유머>

 

사회    문혜영

참석 인원   18명

일시    2011. 9. 17.

장소    계간수필 사무실

정리    박영덕

 

|집중조명-작품|

 

엄마의 마지막 유머

 

박완서

 

어머니는 구십 장수를 누리셨지만 한 번도 망령된 말씀이나 이상한 행동을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돌아가시기 십여 년 전, 눈 위에 미끄러져 많이 다치신 적이 있다. 대퇴부가 크게 부서져서 두 번의 대수술 끝에 겨우 걸으실 수 있게 되었지만 한쪽 다리가 짧아져서 심하게 절룩거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걸 창피하게 여기셔서 거의 외출을 안 하시는 대신 집안에서는 틈만 나면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마당으로 왔다 갔다 걸음연습에 힘쓰셨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날까지 화장실 출입과 목욕은 혼자 하실 수 있었다. 의식을 놓고 혼수상태에 빠진 건 사나흘밖에 안 됐는데 그 동안에도 간간히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뜨시면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내가 누구냐고 묻는 문병객이나 식구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여주셨다. 그런 어머니가 딱 한 번 이상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아마 돌아가시기 하루 전쯤이었을 것이다. 우린 솔직히 이제나 저제나 그분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번쩍 눈을 뜨시더니 상체를 일으킬 듯이 고개를 드시고는, 당신의 발치를 손가락질하시면서 희미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호뱅이, 네가 웬일이냐?” 하시는 게 아닌가. 어머니가 반기듯이 바라보시는 발치엔 물론 아무도 없었다. 나는 헛것을 보는 엄마의 상체를 다둑거리며 “엄마는, 호뱅이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하려고 했지만 웃음 먼저 복받쳤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조카들이 호뱅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예전에 시골집에 있던 머슴이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그 머슴 좋아했나? 라고 이죽대면서 역시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다들 따라 웃었다. 엄숙하고 침통해야 할 임종 자리가 잠깐 웃음판이 되었다. 호뱅이라는 이름도 좀 코믹한데 어머니가 마지막 본 헛것이 호뱅이라니, 너무 엉뚱해 웃음 밖에 나올 게 없었다. 쉽게 헛것을 볼 것 같지 않은 명증한 분의 임종의 자리에 나타난 헛것이라면, 그분의 마음속에 애정이건 증오건 간에 맺혀있던 사람이어야 마땅하니까, 손자의 상상력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호뱅이를 아는 나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호뱅이가 우리 집 머슴이라고 했지만 실은 우리 마을의 머슴이었다. 그는 이십여 호 밖에 안 되는 작은 우리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고개 및 외딴 집에서 늙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마을 앞 넓은 벌은 이십여 호를 먹여 살리는 농지였고, 땅을 많이 가진 집도 있고 적게 가진 집도 있었지만, 큰 지주도 소작동도 없는 다들 그만그만한 자작농들이었다. 호뱅이네만 땅한 뙈기 없었기 때문에 기운이 센 호뱅이가 품을 팔아서 노모를 부양했다. 시골선 아무리 늙은이라도 쉴 새가 없는데 그 노인네만은 늘 장죽이나 물고 오락가락했다. 병신자식 둔 사람이 더 효도 받는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로 봐서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그를 호뱅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걸로 봐서나 약간은 모자라지 않았나 싶다.

기운은 장사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삼촌들도 대처에 나가 있어 남자 일손이 달리는 집이어서 아마 호뱅이를 제일 많이 썼을 것이다. 나도 예사롭게 그를 호뱅이라고 부르다가 삼촌보다 더 나이 들어 뵈는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문득 미안해진 건 아마 서울서 학교를 다니게 된 후였을 것이다. 방학 때만 보게 되는 스스러움과 학교 다니면서 익히게 된 예절 교육 덕으로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불편해졌다. 그러나 상하 위계질서 따지기 좋아하고, 호칭에 까다로운 우리 집 어른들도 호뱅이는 장가를 못 갔으니까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어른 취급을 안 해주는 당시의 풍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십여 호가 두 가지 성(姓)으로 구성된 씨족 마을에서 호뱅이는 어떤 성에도 소속이 안 되는 이방인이었다. 따라서 누구 형이라든가 누구 아저씨라는 식으로 바꿔 부를 만한 인척간의 호칭도 그에게는 해당이 안 됐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호뱅이를 제일 요긴하게 쓸 적은 엄마하고 내가 시골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올 때였다. 서울서 힘들게 사는 우리를 위해 할머니는 뭐든지 싸주고 싶어 했고, 엄마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오고 싶어 했다. 쌀을 비롯한 올망졸망한 잡곡, 무, 배추, 감자, 옥수수 따위를 지게에 높다랗게 지고 앞서가는 호뱅이의 정강이는 구리 기둥처럼 단단했지만 얼굴 표정은 너무 착해서 모자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의 노모가 마을 사람들에게 애걸복걸 중신을 부탁해서 장가도 몇 번 안 가본 건 아닌데, 여자들이 하나같이 열흘을 못 살고 도망쳤다는 소문이고 보니 똑똑해 보일 리가 없었다.

한번은 내일이 개학날이어서 오늘 안 돌아갈 수가 없는데 장대비가 계속되어 개성 역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냇물다리가 떠내려간 적이 있다. 다리만 떠내려간 게 아니라 냇물이 사나운 강물처럼 황토 빛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울먹울먹했다. 호뱅이는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고 짐을 먼저 강 건너에다 내려놓고 되돌아와 나를 지게 위에 올라 앉혔다. 그가 지게 작대기로 얕은 데를 골라가며 탁류를 헤치는 걸 지게 위에서 내려다보며 느낀, 노한 자연에 대한 공포감과 우직하고 강건한 남자를 미더워하던 마음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딸을 태운 지게 뒤를 따라 호뱅이만 믿고 강을 건너던 엄마의 마음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는 60여 년 전, 엄마의 임종 당시로부터 계산해도 50여 년 전 일이다.

철없이 한바탕 웃고 나서 이내 숙연해졌다. 어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저승길 가기가 아마 걱정이었을 것이다. 그때 홀연 호뱅이가 떡판처럼 든든한 등을 빌려주기 위해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 착한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한다는 미카엘 천사처럼.

호뱅이한테 업혀서라면 어머니를 안심하고 떠나보내도 될 것 같았다. 호뱅이가 하늘나라 주민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집중조명-좌담|

 

사회 :  반갑습니다. 한가위는 잘 보내셨는지요? 바쁘신 중에도 함께 해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부터 ≪계간수필≫ 제66회, 겨울 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조명할 작품은 지난 1월에 타계하신 박완서 선생의 <엄마의 마지막 유머>입니다. 1970년도 마흔 살의 나이에 등단하여 40년간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으셨던 분이십니다.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보다는 덜 알려진 작품, 오래전 작품보다는 비교적 최근작으로 뽑으려고 2007년도에 발행한 선생의 산문집 ≪호미≫와 2010년도에 발행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두 권을 집중적으로 읽고, 그 중 ≪호미≫에서 <엄마의 마지막 유머>를 택했습니다. 선생의 문학을 더욱 깊이 있게 음미시켜주는 다른 작품들이 많았지만 호흡이 너무 긴 글들은 아쉽지만 배제하였습니다.  

  오늘 집중조명에선 김애양 선생님이 작가론을, 그리고 최순희 선생님이 작품론을 맡아 수고해주시겠습니다. 그럼 먼저 김애양 선생님의 작가론을 들어보겠습니다.

김애양 : 문우회의 막내둥이인 제가 박완서 선생님의 작가론을 발표하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했는데요, 제가 수필을 쓰기 시작했을 때 처음 읽었던 것이 바로 박 선생님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이렇게 쓰는 거로구나 하는 걸 배웠고,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전업주부였던 박완서씨가 나이 마흔에 등단을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저도 40세였거든요. 문학은 반드시 전공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과 마흔도 늦은 나이가 아니라는 점이 무척 고무적이었지요.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박 선생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단 생각을 합니다.

    제가 제목을 ‘천의무봉의 작가 박완서’라고 붙였는데요, 그건 평론가 김윤식 선생님이 “병의 물을 거꾸로 쏟는 듯 유려하고 한 점 막힘이 없는 천의무봉의 작가다.”라고 평한 다음부터 박완서 이름 뒤에 자주 따라다니는 표현입니다. 그럼 먼저 작가의 프로필을 살펴보겠습니다.

    선생은 1931(辛未)년 10월 20일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신여성이 되어 주길 바란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조부모와 숙부모 밑에서 유년을 보내다가 1944년 숙명여고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여중 5학년 담임으로 만난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고, 또 한말숙과 교분이 두터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했는데, 그때 의용군으로 나갔던 오빠가 여덟 달 만에 죽고 삼촌도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51년 미군부대 PX 초상화부에 취직을 했는데 이때 화가 박수근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됩니다.

    1953년 호영진씨와 결혼하고 오 남매를 낳아 기르며 살림에 묻혀 지내다가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하게 됩니다. 이후 6․25전쟁과 분단문제, 물질중심주의 풍조와 여성 억압에 대한 현실비판을 사회현상과 연관해서 작품화하며 명실공히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처녀작 ≪나목≫을 비롯하여 ≪세모≫(1971) ≪부처님 근처≫(1973) ≪카메라와 워커≫(1975) ≪엄마의 말뚝≫(1980) 등은 6․25전쟁으로 초래된 작가 개인의 혹독한 시련을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산문정신으로 쓴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 ≪서 있는 여자≫(1985)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등을 발표하면서 여성의 억압문제에 눈길을 주어 여성문학의 대표로 주목 받았습니다.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고 가톨릭에 귀의하였으며 이때부터≪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등 자전적인 소설을 발표하면서 6․25전쟁의 오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은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40년간 끊임없던 집필활동은 선생을 병마로부터 이길 힘을 앗아버렸는지 담낭암을 이기지 못하고 타계했는데 그날이 2011년 1월 22일이었습니다.

  저서로는,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6) ≪창 밖은 봄≫(1977) ≪배반의 여름≫(1978) ≪도둑맞은 가난≫(1981) ≪엄마의 말뚝≫(1982) ≪서울 사람들≫(1984) ≪꽃을 찾아서≫(1986) ≪저문 날의 삽화≫(1991) ≪나의 아름다운 이웃≫(1991) ≪한 말씀만 하소서≫(1994)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등과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 ≪혼자 부르는 합창≫(1977) ≪살아 있는 날의 소망≫(1982)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1990) ≪어른노릇 사람 노릇≫(1998) 등이 있습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1980),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1981),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1990)과 제3회 이산문학상(1991),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1993),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제25회 동인문학상(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제5회 대산문학상(1997),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로 제1회 황순원 문학상(2001)을 수상했으며, 제16회 호암예술상(2006),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수여하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는 명예문학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선생은 글을 쓰는 이유 몇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했고 “40년 전 등단 직후나 지금이나 문학적 비유를 찾느라 여전히 고민하고, 다 쓰고 나면 똑같은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러니 억지로 쓰지도 않을 거고, 억지로 안 쓰지도 않을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후에 “저에게는 1988년 당시 26세였던 아들을 잃은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1년 정도 붓을 꺾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문학입니다. 글을 집필하면서 조금씩 위안을 삼았습니다.”라고 하셨지요. 또 “내게 글을 쓴다는 건 내 고통의 일부를 독자에게 나누는 거예요. 내 고통을 글로 옮기면서 내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죠.”라고도 하셨습니다.

 

사회 : 김애양 선생님 감사합니다. 역시 젊은 선생님답게 깔끔하게 잘 정리 해주셨습니다. 그럼 다음은 최순희 선생님께서 작품론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순희 : 박완서에게 있어 수필과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등단작 <나목>이 원래는 신동아 논픽션 공모작품으로 집필 중 자꾸 자신이 개입하고 자신을 작품 속에 투사하고 싶어함을 깨닫고, 픽션을 가미하여 소설로 만든 작품이란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생적으로 그는 소설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수필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나목>도 많이 읽혔지만 필명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첫 수필집 ≪꼴찌에게 갈채를≫이후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일 등에게 익숙한 사람들인데 꼴찌에게 갈채를 보낸다는 것은 제목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지요.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다.”

    박완서의 어머니는 무엇보다 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에 여덟 살의 어린 작가를 서울로 데려옴으로써 작가가 근대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 어머니의 삶 자체가 극심한 역사적 격변의 시기와 맞물린 삶의 극적인 계기들을 압축해놓고 있어 박완서 문학의 고갈되지 않는 소설적 소재가 되어주기도 했었지요. 나아가 어머니는 자신의 뛰어난 이야기꾼적인 재능으로 어린 박완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설 ≪엄마의 말뚝≫ 연작 속의 엄마를 예로 들자면,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한 시기부터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는 분단의 현실을 살아온 한 여성의 삶의 기록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육화된 이 시대 어머니들의 몸과 마음은 한국 근대사의 진행과정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살아 있는 육체이자 표본이어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살펴보기 좋은 텍스트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환경적 요소들은 수필 <우리 엄마의 초상>에도 그대로 그려져 있어 수필 버전의 <엄마의 말뚝>인 셈이고, 여기에 나온 엄마의 이야기는 다시 수필 <살아 있는 날의 소망>에도 반복이 됩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집중토론 작품인 <엄마의 마지막 유머>는 2007년도에 발표한 ≪호미≫에 실린 작품입니다. 수필집 ≪두부≫(2002) 이후 ≪호미≫(2007)에 이르면서 이 사회와 세태와 사람과 자연, 그리고 늙음과 죽음에 대한 사유에서까지 한결 너그럽고 따뜻해진 작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면서도 지겨워하고 어려워하면서도 애틋한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본 어머니의 임종 직전의 한 장면에서 웃음을 발견함으로써 임박한 죽음의 침통함과 무거움을, 그리하여 죽음과 이별의 슬픔을 담담하게 털어내고 있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엄숙하고 침통해야 할 임종의 자리가 잠시나마 웃음판이 된 사연을 쓴 이 소품이 예의와 금기를 준수하는 전통적인 수필에 익숙한 독자의 눈에는 경박한 금기의 파괴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육친에 관한 글일수록 끈끈하고 감상적인 덧칠을 하기 일쑤인 우리 수필가들에겐 권위의 파괴로 여겨져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까지 포함하여 독자에게 솔직하게 ‘고자질하는’ 이런 식의 탈권위야말로 박완서 수필을 매력 있고 생동감 있게 만드는 장점이고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 수고하셨습니다. 최순희 선생님은 작가론을 말씀해 주셨지만 박경리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얘기하자면 하룻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 작가론도 나오고 작품론도 나왔는데 이제 이 작품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요.

김영만 : 두 분 선생님께서 애정을 갖고 연구해 오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말년에 수필을 많이 쓰셨어요. 근데 그게 개인사여서 수필에 의탁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작품은 석 장짜리 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소설과 수필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봐야하는 건지는 우리가 좀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정진권 :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그동안 박완서 선생의 수필을 읽어 본 게 없습니다. 해서 이번에 큰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우선 제목이 좀 이상했습니다. 어머니가 헛것을 보고 “호뱅이, 네가 웬일이냐?”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머인가? 무슨 반어법인가도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웃음 먼저 복받쳤다.”는 말도 그래요. 저는 처음에는 “울음이 복받쳤다”인 줄 알았습니다. ‘쌀을 비롯한 올망졸망한 잡곡’이라는 말도 있는데, 꼭 쌀도 잡곡이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엄숙하고 침통해야 할 임종 자리가’ 잠깐이나마 웃음판이 되었다는 것도 저 같은 사람 정서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마지막인 어머니 앞에서 자식이 어떻게 웃습니까? 우스워도 웃지 않는 것, 설령 그게 위선이라고 해도 그런 금기는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태동 : 저는 박완서 선생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박완서 선생님의 수필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산문은 소설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정적인 산문에 익숙해 있는 사람은 이 작품에 대해서는 조금은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산문으로써는 상당히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필 쓰는 분들이 흔히 신변잡기를 쓰는데 주제가 없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문학작품이 그러듯이 수필에는 뚜렷한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또 주제에는 반드시 모랄리티가 있어야 하구요. 안 그러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다가 19세기 초처럼 예술지상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이 작품의 모랄리티는 무엇인가. 이 작품의 주제는 평생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호뱅이가 이 작품의 초점입니다. 다른 분들은 이 작품의 주제를 어머니에 맞추고 계시지만 저는 호뱅이라고 봅니다. 죽은 자까지 업어가는 그런 정신, 그러면서 호뱅이라는 말이 풍기고 있는 뉘앙스 이런 것들이 이 작품의 살아 있는 가치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한숙 : 박완서 선생은 이미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냈고,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고 가신 것이기에 이별의 슬픔도 가볍게 삶의 연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또 소설가이기에 짧은 단락마다 배경이 나오고 주인공이 나오는 플롯을 전개한 게 아닌가 합니다.

남기수 : 저도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도 많이 쓰셨지만 수필집을 15권을 쓸 정도로 수필을 가볍게 생각하셨던 것은 아닐까. 소설과 수필 중에 수필을 더 가볍게 두신 것 같습니다. 수필이라는 것이 자기 심중에서 우러나는 것을 쓰는 것인가, 아니면 감동을 목적으로 글을 엮어 내는 것이 수필인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수필을 대하는 이 작가의 진지성에 의심이 좀 갔습니다.

 

사회 : 박완서 수필을 처음 대한다는 선생님들께는 죄송합니다. 선생께서는 60대에는 촌철살인의 언어들을 즐겨 썼는데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정이 가는 그런 언어들이 좋다고 하셨더군요. 그래서 후기 작품 중에서 고르다 보니 좋은 글들은 분량이 너무 길어서 이 글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박영덕 : 문장이 조금 거칠어서 읽는데 다소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감 넘치게 거침없이 부려 놓은 문장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이난호 :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냥 술술 읽혔습니다. 매끈한 문장 호흡이 독자에게 아주 친절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평들을 들으면서 아 저런 점도 있구나 생각하게 되는군요. 다만 한 가지 존칭어휘가 걸렸습니다. 한 단락 속에 다섯 번,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꼭 이렇게 다 넣어야 되는지요.

오세윤 : 표현이 참 솔직하군요. 어느 책에서 봤는데 이분이 누군지는 기억에 없으나 가족을 발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목련꽃이 활짝 피어 있는 걸 보고  “꽃이 미쳤나 보다”라고 표현한 것을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대목에서 구성이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줄의 ‘이상한 행동을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뒤의 문장들 ‘돌아가시기 전 …중략… 목욕은 혼자 하실 수 있었다.’까지는 차라리 뒤로 가져다 놓고 일곱 째 줄 ‘의식을 놓고 혼수상태에 빠진 건…’을 당겨 와야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미뤄 놓은 문장은 뒤쪽에 있는 ‘어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뒤에 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홍혜랑 : 소설가라서 구성이 세련된 감을 느꼈습니다. 독자가 아주 설득력 있게 읽을 수 있는 구성입니다. 저는 서두에서 나오는 “이상한 말씀을 한 적이 있다.”라는 부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상한 말씀이 마지막 결어 부분에 가서 호뱅이 등에 업혀서 가시는 것과 연결 지어지기 때문입니다.

백임현 : 저는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거의 섭렵을 했습니다. 같은 시대를 박경리씨는 역사를 썼고 이분은 역시의 뒤안길에서 일어나는 개인사를 썼습니다. 이 작품을 소설로 읽어야 할 것인지 수필로 읽어야 할 것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픽션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보았구요. 소설이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수필로써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주제가 좀 모호합니다.

남민정 : 우리 어머니가 가실 때 호뱅이 등에 업혀서 편하게 가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소설적도 아니고 수필적으로도 아니게 쓰신 것 같습니다. 이분이 자연에 대한 수필은 좋은데, 인간에 대한 수필은 저항감을 갖고 약간은 비뚤게 쓰셨던 것 같습니다.

염정임 : 저는 선생님의 작품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처음 봤습니다. 거기 실린 소설들은 작품마다 메시지가 강했고 주제가 선명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수필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수필과 소설에 똑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냈지요. 중간 중간 저항이 가는 데가 있지만 어머니의 한 말씀을 갖고 이렇게 작품화했다는 것이 박완서 선생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고봉진 : 여러 가지 말씀이 있으셨는데 저는 이 글이 아주 읽기 쉽고 설득력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의 매우 중요 요소인 구성이 아주 잘되어 있습니다. 사실을 순서대로 그저 나열하는 것이 수필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성을 하다보면 화소들을 선택을 해야 하고 그것들을 풀어놓는 순서를 정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요. 앞에 ‘나는 집히는 데가 있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뒤에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소설이건 수필이건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끌고 가는 힘 있는 작가가 좋은 작가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박완서 선생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작가입니다.

 

사회 : 박완서 선생은 어느 수필에서 기억에 관하여 “마치 장구한 세월을 냉동 보관된 식품처럼 썩은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건 기억이 아니라 차라리 질병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의 문학은 그 생생한 기억들에서 피워낸 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생의 다른 수필 <유년의 뜰>에서 발견한 말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의 참다움, 인간만의 아름다움은 보통사람들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어 있는 것이지 잘난 사람들이 함부로 코에 걸고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엄마의 마지막 유머>는 바로 ‘호뱅이’라는 인물을 통해 바로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오늘 좋은 말씀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합평회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