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수필가⑤ | 김영만 편

 

몽유도원도를 들여다보며

 

김영만

 

옛 그림을 보다가 그림 그린 이가 궁금해지면 으레 뒤의 낙관을 찾게 된다. 언젠가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조선시대 무낙관회화전’을 본 적이 있는데, 내겐 꼭 주인이 없는 빈집을 찾아온 기분이어서 허전했다. 이번에야 보게 된 몽유도원도 앞에 서서 남모를 허전함을 느끼게 된 것도 거기 안견의 낙관이 없다는 데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그림의 우측 하단에 있는 ‘지곡 가도 작’(池谷 可度 作)이라 한 관서(款書)는 정말 안견이 아닌 안평대군이 대신 써넣은 글씨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몽유도원도에서 정작 안견은 만나보지를 못한 것이다. 허전함을 넘어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안견은 왜 대군이 써 주도록까지 자신은 낙관을 하려 하지 않았을까. 혹 무낙관으로 이 그림에서의 자신의 부재함을, 무언가의 속맘을 오히려 그렇게 드러내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내게 든 것은 이 도원이 안견 자신의 도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는 도원이 그림을 그리는 안견의 안목으론 도원이 아닐 수도 있어서였다. 사람들의 말대로 안견을, 저 중국 북송대의 이성, 곽희 등의 이른 바 북종화의 한 맥으로 보고, 사시팔경도나 적벽도,어촌석조도까지 그의 그림으로 추정을 한다면, 정말 이 몽유도원도는

 

 

그런 안견의 그림으론 파격이 아닐 수가 없다. 천․지․인, 삼재의 참여(參天地化育)를 이상으로 하는 북종 산수화 어디에도, 전칭되고 있는 안견의 그림 어디에도 있어야할 사람이 빠진 이런 그림은 없다. 비록 잘 보이지 않는 어느 한 구석일망정 거기 동참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몽유도원도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빈 집, 빈 들, 빈 배일 뿐,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바람마저 멎은 듯한 텅 빈 마을, 그 가운데 금빛의 도화(桃花)만이 유난스레 피어 있을 뿐이다. 나는, 사흘 만에 그려 들고 온 이 그림 앞에서 반색을 하고 있는 대군과 자신의 그림이면서도 낙관은 고사하고 오히려 낯이 설어 멀찍이 바라보고 서 있는 안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어지럽기까지 했다. 둘의 숨길 수 없는 간극을 보게 된 것이다. 이 간극은 대군과 붓을 든 한 화인(畫人)의 신분적 간극을 넘어, 인간의 낙원을 찾는 한 거대 담론가와 오히려 그 낙원의 무늬와 결을 찾는 한 섬세한 화인의 간극이었으며, 인간의 낙원이란 무엇이고 어디 있는가를 묻는 한 개념론자와 낙원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는 한 구성론자의 간극이기도 하였다.

인간의 낙원이란 본디 거대 담론가들의 ‘꿈속의 낙원’이었다. 안평대군의 도원만이 아니라 허균의 율도국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맑스의 공산사회도 들여다보면 다 그러했다. 이 견광의 거대 담론가들은 심한 우김성까지 가지고 있어, 자신들의 한낱 꿈을 모두의 꿈으로 만들려 하거나 그 논리 속에 가두어 사람들을 꼼짝 못하도록 하려 하거나 했다. 그리라는 그림만을 그리게 하고, 쓰라 하는 글만을 쓰게 하고, 부르라 하는 노래만을 부르게 했다. 사람들은 꿈을 잃고만 것이다. 아니 저들의 꿈으로 대체가 되고 만 것이다. 저들 앞에 하릴없는

 

 

‘밥벌이’가 되어 그 주변만을 끝없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안견이 호(號)를 ‘주경’(朱耕)이라 하고, 자신을 ‘밥벌이 그림쟁이’로 자처한 일을 지나쳐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듯 자신은 인주 묻은 붉은 도인(圖印)을 눌러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자라 했다. 밥만 준다면 무슨 그림인들 그릴 수 없겠느냐는 게 당대의 화인, 안견이 내뱉은 자조와 한숨의 고백이었다. 몽유도원도에 낙관을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밥벌이라 하니 내게도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나는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며 밥을 벌어먹고 살아왔다. 때론 밥이 적어 주변을 이리저리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조그마한 유혹에 가슴 설레 본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내 마음을 접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곤 한 건 내 타고난 능력의 한계라는 것 말고도 다른 까닭이 있었다. 하는 일이 꼭 밥벌이만이라 한다면 보잘것 없는 나 자신이 더 초라해지고 더 왜소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였다.

그랬던 난데, 이 일을 크게 후회한 적이 있다. 자리를 박차고 일찍 뛰쳐나가지 못했던 걸 반성까지 해본 적이 있다. 나 자신이 ‘밥벌이 선생’으로 철저히 인식되고 고백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작은 이 교실에까지 이른바 이념의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칠 때였다. 낙원에 대한 누군가의 꿈에서 연유했을 이 바람은 문풍지 소리까지 잠을 재워야 하는 교실 안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그 눈빛이 달라져 보였다. 인권이니 자유니 해방이니 하는 용어까지 동원하던 아이들은 학교나 사회를 향해 전선 비슷한 걸 구축하려 드는가 하면, 진보니 보수니 혁신이니 개혁이니 하며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선생님들은 모든 시각의 교정을 아주 구체적으

 

 

로 요구해왔다. 들고 있는 교과서도 다시 써야 하고 편제도 조직도 바꿔야 하며 아무개 아무개 하던 고유명의 아이들도 계급적 시각에서 보통명사화, 평등화해야 했다. 그것이 낙원으로 가는 길이라 했다.

나는 갑자기 이 거대 담론가들에 둘러싸여 주눅이 들어버렸다. ‘밥벌이 선생’이란 말 외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이 되어버린 나 자신에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혼자서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대고 있었다. 인간의 낙원은 과연 있는 것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은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꿈을 다시 찾아주는 곳일 게다. 밥 때문이 아닌 자신의 꿈 때문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노래도 하는 곳일 게다. 그리고 그곳은 분명 이런 소란스런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거대 담론으로는, 이런 우김질로는 결코 찾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국립박물관 전시실, 그 묵시적 조명 아래 안견은 무낙관의 몽유도원도로 오히려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전 수필산책문학회 초대회장.

수필집 ≪귀를 열면 마음이 열리고≫<공저> 외

 

이 계절의 수필가⑤ | 김영만 편

 

유토피아 꿈을 위한 억압적 실체

 

평설_ 이태동

 

근자에 김영만은 <몽유도원도를 들여다보며>라는 보기 드문 수작을 발표했다. 그는 한때 수필문우회 간사로서 김태길 선생과 함께 수필 문우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비록 그는 나이가 있지만 아직까지 현역이나 다름없이 ≪계간수필≫ 편집위원으로 일을 하고 있으며, 현재 수필집 출간 준비에 바쁘다. 그는 일생 동안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교장으로서 학교 행정을 오랫동안 했던 때문인지, 침묵 속에서의 경건함은 물론 교사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점잖은 품격이 그에게서 보이지 않게 묻어나고 있다.

우리가 그에게서 이렇게 친숙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엄숙한 인간적인 무게를 느끼는 것은 과거 우리가 학교를 다녔을 때 우상(偶像)의 존재로 알았던 교장선생님에 대한 기억과 향수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6․25를 거쳐 조국 근대화의 짐을 지고 살아왔던 우리들 세대의 정신적 지주는 엄격한 모습을 하고 학생들에게 정신 교육의 손길을 놓지 않았던 고등학교 교장 선생이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모두 아침 조회 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가하는 문제에 관해 훈시를 하는 교장 선생님의 말이 보이지 않게 마음에 새겨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김영만에게서 조용히 느껴지는 경건한 선비적인 몸가짐과 품격은 그가 일생을 바친 교직 생활이나 교장으로서의 학교 행정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아니다. 그것의 뿌리는 그가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엄격한 유교 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퇴계를 숭모한 조부에게서 전수받은 퇴계의 필사본인≪근사록(近思錄)≫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퇴계 사상에 심취해서 논문까지 썼다. 유학을 유학답게 만들었다는 이 책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어 왔고,” 당시 퇴계의 문하인들의 “실천적 학문세계는 격변기의 비장한 선비상의 발현”을 가능하게 했다. 김영만은 자기에게 엄격한 유교적인 교육을 몸소 체험하게 한 조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썼다.

 

 “…끝내 단발령을 거부하셨던 노기에 찬 그 눈길, 그러나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나타나신 큰 조부의 모습을 보시고 3일 낮밤을 통곡으로 보내시던 조부, 뒷산 부모님 묘역에 움막을 짓고 1백일 시묘를 마치시고 내려오시던 그 모습,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많은 외로움의 세월을 옷자락 하나 흩뜨리지 않고 학처럼 고고히 살아오셨던 조부, 그리고 언제나 그처럼 앉아 계시던 그 경건 그 집념… 나는 지금 육안으로 보이고 있는 양… 이렇게 조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내가 눈을 뜬 데에는 오르지 어머니의 간절하고도 눈물겨운 어쩌면 기도와도 같은 소망 때문이었으리라.

 

이것뿐만 아니다. 그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백범의 ‘유묵 한 점’에서 김구 선생님의 기개와 정신, 즉 ‘활연하고도 장쾌한 숨결, 웅혼한 기상, 그리고 꿈틀거리는 투지’를 느끼고 호흡하며 살아왔다.

월터 페이트가 ‘글이 사람’이라고 말했듯이, 그의 글에는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선비 정신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문체는 결곡하고 무게가 있어 일정 부분 경건한 위엄마저 느끼게 한다.

김영만을 ‘이 계절의 수필가’로 선정한 것은 그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전통적인 가치를 새로이 조명하는 글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근자에 발표한 글 <몽유도원도를 들여다보며>는 조선 회화(繪畵)에 대한 남다른 식견은 물론 역사성과 사회성을 함께 지니고 있어 서정적인 수필에만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한국 수필가들은 철학자 몽테뉴의≪수상록≫과 같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을 써 오지 못하면서도 사회성이 있는 글을 외면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수필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개인의 삶을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수필계도 수필에서 사회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김영만의 <몽유도원도를 들여다보며>는 우리 수필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마저 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의 주제는 거대담론의 표상인 ‘유토피아’란 것이 토마스 무어가 말한 ‘유토피아’나 혹은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공산사회처럼 이 세상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힘을 가진 세력들이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깃발을 들고 힘없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행복한 삶의 잔무늬를 파괴하는 슬픈 현실을 개탄하며 비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안견이 자기의 낙관이 없이 안평대군의 요청에 의해 그린 <몽유도원도>은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낙원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견이 자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꿈의 세계를 그려야만 했던 것은 화인(畵人)이라는 그 당시 낮은 사회적 신분 때문이라는 것을 역사적이고 사회학자적인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몽유도원도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빈 집, 빈 들, 빈 배일 뿐.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바람마저 멎은 듯한 텅 빈 마을. 그 가운데 금빛 도화(桃花)만이 유난스레 피어 있을 뿐이다. 나는, 사흘 만에 그려 들고 온 이 그림 앞에서 반색을 하고 있는 대군과 자신의 그림이면서도 낙관은 고사하고 오히려 낯이 설어 멀찍이 바라보고 있는 안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어지럽기까지 했다. 둘의 숨길 수 없는 간극을 보게 된 것이다. 이 간극은 대군과 붓을 든 한 화인(畵人)의 신분적 간극을 넘어, 인간의 낙원을 찾는 거대담론가와 오히려 그 낙원의 무늬와 결을 찾는 한 섬세한 화인의 간극이었으며, 인간의 낙원이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한 개념론자와 낙원은 어떠해야만 하는가를 묻는 한 구성론자의 간극이기도 했다.

인간의 낙원이란 본디 거대담론가들의 ‘꿈속의 낙원’이었다. 안평대군의 도원만이 아니라 허균의 율도국도,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도, 마르크스의 공산사회도 들여다보면 다 그러했다. 이 견광의 거대담론가들은 심한 우김성까지 가지고 있어, 자신들의 한낱 꿈을 모두의 꿈으로 만들려거나 그 논리 속에 가두어 사람들을 꼼짝 못하도록 하려 하거나 했다.

 

이렇게 김영만은 국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낙관이 없는 것을 보고 교장이었던 자기를 안견에 비유하며, 과거 소란스러운 이념의 논쟁 속에서 자기 삶이 얼마나 어려웠다는 것을 회상하며 유토피아는 지상(地上)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의 담론이 과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아니 내일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그만큼 크다.

그래서 이 작품은 구성과 언어적인 스타일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에서 탁월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김영만이 보다 넓은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나타내고 있는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문제를 기초로 해서 그의 시련기에 겪어야만 했던 자전적인 슬픈 경험 문제보다는 유토피아의 허구성과 그것에 관련된 이데올로기 문제만을 좀 더 심도 있게 논했다면, 본인이 이 작품을 두고 소심하게 보수주의자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그의 담론도 한결 더 깊이가 있었을 것이다.

 

 

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