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비평|

 

풍성한 가을

 

오세윤

 

수필은 자신을 소재로 하는 순수 인간문학이라고 한다. 작가 자신이 관여되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 필히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윤리학 강의여서는 아니 된다.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뜻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건 슬픈 감정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

독자에게 지적 기쁨을 주는 글, 뭉클한 정으로 가슴에 닿는 글, 깨우침으로 숙연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라야 수필로서의 생명과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러려면 수필작가는 마땅히 스스로 도덕적이어야 하고 휴머니스트라야 하고 지적이어야 하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사유하는 생활인이어야 한다. 뿐인가. 풍부한 시적 감성과 해학마저도 요구되니 수필이란 간단히 쓸 수 있는, 붓 가는 대로 써서 되는 글이 아니다. 어쨌거나 지적 즐거움이든 서정성 짙은 감동이든 아니면 유연한 깨우침이든 어느 하나는 있어야 참 수필로 자리매김 될 듯싶다.

울림이 강한 좋은 수필을 쓰는 이를 만나면 거의 대부분 그가 지극히 겸손하다는 것, 연륜과 고졸한 지적 인격임에도 지극히 순수한 성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또한 내적으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 자기 존중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알게 된다. 오상고절한 수필적 기개요 자타불이의 따뜻한 품음이다. 오만한 사람, 공명심에 불타는 사람으로 좋은 수필을 쓰는 이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유머와 겸손이란 면에서 강호형의 <종로에는 돼지꼬리가 있다>는 전범이다. 제목에서부터 빙긋 웃으며 들어가 중간 중간마다 싱글거리게 하는 유머와 여유가 평안하고 즐겁다. 읽는 이로 하여금 허름한 술청의 둥근 식탁 앞에 함께 앉아 있는 듯 느끼게 하는 탁월한 현장감. 돼지꼬리 안주 앞에서는 4,000cc급 승용차를 모는 소재벌이나 늘 주머니가 가난한 작가나 노숙자나 다 평등하다. 작가의 평민정신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강호형 문학의 또 하나 걸작이다. 수필은 필히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걸 일깨우는 글, 누가 낄낄거리지 않고 이 글을 읽을까. 이 바로 맛깔스럽게, 마음 편하게 세상을 사는 수필가의 넉넉한 모습인거니.

글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써야하는 건 수필의 도道인가 법法인가, 아니면 의무인가. 고선윤의 <언어>를 읽다보면 답은 자명해진다. 억지가 없는 글이 무리 없이 읽힌다. 인성이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어 친근감으로 접근하게 되는 글이 흥미마저 갖게 한다.

 

나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내뱉는 말이 내가 이해하는 바와 다를 때, 나는 그들 집단에서 소외되고 역시 외로워진다. 이건 처음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능가한다.

 

항용 겪는 일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위와 같은 경우는 일본인이나 중국인과의 사이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 듯싶다. 같은 우리네 민족 간에도, 동창이나 회사 같은 가까운 집단 내에서도, 때로는 무촌지간이라는 부부간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상황이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쉽게 오해가 생기고 더 심하게 외로워지는 게 아닌가싶다.

아무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해도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숙지한 연후라야 공감이 형성되고 외롭지 않다는 작가의 글이 큰 설득력을 갖는다.

전하는 메시지가 강하면서도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글을 쓰려면 우선 작가가 현실에서 한두 발짝 비켜서서 관조하는, 자신의 감정과 주장을 뒤로 미뤄두고 따뜻하고 침착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객관적 제 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 자칫 냉정한 방관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수필가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화이부동, 권태숙의 <달아나라, 달아나라>가 바로 이런 글의 대표라 말하고 싶다.

구제역 뒤, 어렵게 다시 열린 소싸움 중계를 보다 어느 순간 작가는 소와 하나가 된다. 소싸움을 빌어 작가는 은유적으로 작금의 시대적 갈등과 대립을 거부감 없이 전달한다. 소처럼 착하고 부지런한 민족이 둘로 갈라져 사상이란 조종자에 의해 맞대결하는 분단 현실을, 영·호남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정치판의 이기주의를, 진보와 보수, 노·사, 빈부격차의 현실을 호소력 깊게 고발하고 있다. 거론하자면 끝이 없을 우리사회의 이런 대립구도를 어서 벗어나 원래의 순박한 우리네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수필답게 썼다. 이 착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착해지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소처럼, 소의 커다란 눈망울처럼 순하고 호소력 강한 수필, 이것이 행간에 뜻을 묻는 우리네 수필이다.

 

박영자의 <매화의 향기로>, 스승 덕계 고故 허세욱 교수의 1주기를 맞아 추모하여 쓴 글이다. 추모의 글이라고는 해도 돌아가신 분의 업적이나 생전의 모습보다는 다 늦게 제자가 되어 어떻게 그분의 인품에 영향 받았는지,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회상하며 고마움을 나타낸 글이다.

생떼 같은 다 큰 딸을 잃은 슬픔의 한계점에서 간신히 마음을 추스를 쯤 작가는 허 교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기 제자들과 함께 중국여행을 시작한다. 그것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 우울증에서 벗어나 마음의 건강을 되찾는 계기가 되고 지행일치의 올곧은 생활을 하게하는 빌미가 됐다. 하여 작가는 허 교수를 은인으로 새겨 육친의 정으로 공경한다.

그렇잖아도 너그러운 성품인 작가는 교수의 가르침에 더욱 교화되어 주위를 넉넉하게 감싸고 널리 베푼다. 스승을 통하여 옛글 배우는 이가 이렇듯 신信과 의義로서 모범을 보인다면 이게 바로 수학의 궁극이 아니겠는가. 가르친 이로서는 이보다 더한 기쁨 없을 터. 이것이 곧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 의해 승화하는 바람직한 귀착이라고 말해서 좋으리라. 속이 저리면서도 숭엄하여 새삼 옷깃을 여민다. 엎디어 다시 한 번 더 선생의 명복을 빈다.

 

원인조차 모르는 고약한 병, 루푸스. 많은 환자들이 투병을 포기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일전, 행복전도사 최윤희씨도 그랬다.

정선모의 <신령한 북소리>. 딸은 루푸스라는 고약한 병을 앓는다. 완치가 없는 병. 자가 면역질환의 하나인 이 병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야하는 면역세포가 자신의 신체장기를 공격하는 난치성 질환. 다른 하나인 류머티스 관절염은 간혹 늑막이나 심막을 침범하기도 하지만 주로 관절을 공격하는데 반해 루푸스는 체내의 모든 장기를 적으로 오인하여 무차별적으로 공격, 조직을 파괴하고 극심한 통증을 유발한다. 주로 20~30대의 가임여성에 호발하며 임신으로 여성호르몬이 증가하면 증세가 더 악화되기도 하는 무서운 병.

그런 병에서 딸을 헤어나게 한 작가의 처절한 북치기. 가슴이 둥둥 북소리를 따라 뭉클하게 운다. 하지만 글에는 독자에게 아픔을 강요하는 처연함은 없다. 원시적이라 할 이 지극한 모성 앞에 병마도 천리만리로 달아났다. 읽는 이는 가슴이 아프다가도 해피엔딩에 부담 없이 감동한다. 수필은 이렇게 긍정적인 모습이어야 좋다.

 

무척 기분이 상했나보다. 김명규의 <꽃이 시든 자리처럼>. 작가의 대부분의 글들이 간결하면서 따뜻하여 유머러스한 여유를 보이는데 반해 이 글에서는 기분상한 속내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쌍계사 나들이에서 만난 유명(?) 소설가, 그 오만하고 도도한 탯거리에 작가는 무척 화나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자주 있지 않던가. 하나하나 대거리하다가는 받는 상처가 아물 날이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작가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털어놓는다.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내 주위에도 간혹 이런 이들이 있어 심심찮게 상처를 받는다. 해서 글로 엮어 공개하고 싶은 유혹을 수시로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써 발표하고 나면 시원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책하는 마음이 스스로에게 겹치기로 상처를 준다. 연후에 보면 차라리 아니 씀만 못했다는 걸 깨우치게 된다. 게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상대는 끄떡도 않는다는 사실.

운위할 가치도 필요도 없는 그런 이들의 오만함에 분노해야 할까는 생각해볼 문제다. 어쩌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속이 허하여 그를 감추고 메우느라 그렇듯 행동하지 않는가 싶다. 마치 일관된 정견 하나 못 가진 늙은 정치인이 눈썹 성형을 하고, 억만금을 모은 이가 오로지 겉치레에 치중하는 것과 다름없는 맥락이다.

내 주위에도 그런 친구가 몇 있다. 남에게 술은커녕 점심 한 끼 안사며 몇 십억이란 어마어마한 돈을 통장에 쟁여놓은 의사친구, 은퇴한 뒤로 그는 고급스럽게 차려 입고는 얄밉상스럽게도 기껏 공짜 술자리만을 찾아다닌다. 덜 가진 친구들 앞에 목에 힘을 주는 걸로 사는 즐거움을 삼는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속이 메슥거려 두어 번 글을 써 발표하긴 했지만 속이 예상처럼 그리 시원해지지 않았다. 되레 나만 옹졸한 사람이 된 듯하여 뒤가 영 개운치 않았다.

사람에게 끝까지 남는 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공명심이라고 한다. 어쩌다 등단하여 작은 상을 하나 받더니 대단한 문필가라도 된 듯 착각 속에 사는 후배의사, 대기실 벽 한 면을 상 받은 사진과 기사화된 신문과 발표하여 활자화된 자기 글들로 도배칠갑을 하고 어깨를 으쓱대며 산다. 나는 그를 꼬집고 싶어 안달을 했다. 하지만 참았다. 다행이었다. 얼마 뒤 그와 나는 같은 모임에 속하여 동인이 됐다. ‘참는 자에 복이 있나니.’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인간행동의 원동력은 이기주의라고 했으니 이런 사람들까지도 품는 게 수필가의 마음자세가 아닐까 한다. 바른 사람만을 상대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빠듯한 세상, 고운 사람들만을 찾아 만나고 이야기하며 사는 건 어떨까. 세태를 생각하게 하는 여운 짙은 수필이다.

이 가을 발표된 글이 안팎으로 풍성하다. 시적 감성과 지성과 철학적 사유가 올올한 글들, 이 어령선생의 글을 비롯하여 이런 글들이 이번 가을 호에 모두 실렸다. 풍성한 가을이다.

 

 

≪시와 산문≫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상 한국수필·보령의사수필문학상 외

수필집 ≪은빛 갈겨니≫ ≪갈채≫ ≪등받이≫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