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異邦人)의 슬픔

 

이태동

 

무섭게도 추웠던 지난해 겨울 혹한이 끝나가고 봄이 오는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구순을 훨씬 넘어 걸음을 걷기가 많이 불편했기 때문에 의료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양로원에서 지내시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말씀은 하지 않지만 서운해 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의 집에 대한 애착은 눈물겹도록 집요했다. 비록 다리가 불편해서 서울로 올라오셨지만, 어머니는 그동안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속에서도 꽤 오랜 세월을 홀로 시골에서 보냈다. 시골집이 폐가(廢家)에 가까웠을 정도로 퇴락했지만, 어머니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기를 고집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그 옛날 꽃가마를 타고 시집와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굴곡 많은 고난의 50년 세월을 보낸 추억과 애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겨울 아내와 나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녹번동에 있는 어느 실버타운을 찾았다. 아카시아 숲이 있는 언덕 기슭에 자리 잡은 양로원은, 병원은 물론 휴양 시설을 모두 갖춘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우리는 양로원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시설을 돌아본 뒤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거처할 방에 들어선 순간, 주변 시설은 깨끗하고 좋아보였지만 그곳에 넘쳐흐르는 고독 때문에, 갑자기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옴을 느꼈다. 사실 어머니의 방과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순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러야 할 방이 무슨 감옥과도 같다는 느낌이 엄습해 왔다.

그때부터 나는 침묵한 채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우울했다. 나는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추위에 떨며 옆에 아내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異邦人)>에서 양로원에 있는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부음을 듣고 전혀 눈물을 보이지 않고 뜨거운 햇빛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와는 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네카의 말처럼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기”때문이던가.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모셔 가기 전날 밤, 나는 보통 때와 달리 2층 방에 머물고 있던 어머니 곁으로 가서 어머니의 메마른 손을 잡고 어머니가 살아온 험난한 인생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아직 젊으셨던 시절, 어머니가 내 병역관계 서류 때문에 읍내에 갔다 돌아오던 길에 강물에 놓여 있는 얼어붙은 징검다리를 건너시다 넘어져 부러졌던 손목에 있는 흉터가 유난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어머니는 무심하기 짝이 없었던 평소의 내 모습과 너무나 다른 나의 변신에 놀라는 것 같았다.

비록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모시고 가면서 슬픔이 몰려오긴 했지만, 감정을 쉽게 내보이지 않았다. 객지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영향 때문인지 나는 고생하면서 때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에게조차 항상 이방인처럼 그랬다. 아내는 평소 말이 없고 무심해 슬픈 광경을 보아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무감각한 것처럼 비치는 나를 비정하고 냉혹한 사람이라며 적지 않게 비난하곤 했다.

되돌아보면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어린아이 때는 몰라도 커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기억은 없다. 이국땅에서 공부할 때 아버지가 객사(客死)하셨다는 부음을 들었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앞세우시고 할아버지가 여름 장마 속에서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맏상제로 상복을 입고 할아버지의 관 옆에서 며칠 밤을 지새워야 했지만, 결코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내에게까지 감정 없는 냉혹한 사람으로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 삶의 파도가 너무나 높고 가혹해 감정이 메말라 슬픔에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다. 아니, 천성적으로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은 물론 장례식과 같은 슬픈 상황에서도 눈물을 보이며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고 해서 슬픈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일찍부터 눈물을 보이며 우는 것을 보기 싫어했고, 또 내가 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싫었다. 이러한 나의 심리적인 태도는 미셸 몽테뉴가 스스로 자기는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슬픔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에 유난히 호기심을 가지고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으로 지혜 ․ 덕성 ․ 양심을 치장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럴듯하게도 슬픔이란 낱말을 악의라는 뜻으로 상용하였다. 왜냐하면 이는 언제나 해롭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이어서, 스토아학파는 이를 언제나 겁 많고 비굴한 것이라 하여 그들이 말하는 현자(賢者)들에게 그 감정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를 두고 비극적인 참상이나 광경에 대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냉혈 동물이라고까지 말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슬픔이 더 크다. 비극적 현실에 대한 충격이 너무나 크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질식해서 갑자기 숨을 거둘 수도 있다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미셸 몽테뉴는 이 문제에 대한 심리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 제 3권 14장에 있는 프삼메니투스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집트 왕 프삼메니투스가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의 공격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 딸이 노예가 되어 노예 옷을 입고 물을 길어 오기 위해 그의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주위에 있던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슬퍼하며 울부짖을 때, 그는 침묵을 지키며 꼼짝도 하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또 아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그는 여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로들 무리에서 늙고 병든 그의 종을 보았을 때, 그는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가장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캄비세스는 이것을 보고 프삼메니투스에게 “어째서 그의 아들과 딸의 불행에는 마음이 격하지 않고 종의 불행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느냐?”고 묻자 그는 “종의 불행은 눈물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전자의 두 경우는 마음속을 표현 할 모든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몽테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작은 불행으로 인한 슬픔은 울음으로 나타내지만 보다 큰 불행에 대한 슬픔은 그것으로 다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리라.

 

아내의 말대로 슬픔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말이 없다고 해서 내가 감정이 완전히 메말라 버린 몰인정한 인간일까? 물론 때때로 아내의 말이 옳다고 느낄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아픔과 슬픔을 침묵 속에서 참고 삼켜 왔기 때문에 감정이 무디어져 나타난 현상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방인’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무심했다는 죄를 사형당하는 순간까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가 감정이 무디고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너무나 이성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몽테뉴는 그의 유명한<슬픔에 대해서>란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렇게 심한 슬픈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이성으로 무디게 그리고 두텁게 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