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성물에 비친 불꽃

 

박종숙

 

오래 전 남미여행을 하면서 브라질을 빼놓은 대부분의 나라가 스페인 식민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스페인 하면 투우의 나라, 불꽃같은 정열의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 그 먼 남아메리카 공화국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마침 함께 여행을 해왔던 회원들이 이번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행선지로 잡았다고 하자 내 궁금증을 풀 기회가 왔다고 내심 반가워했다.

더구나 주변의 가까운 문우가 스페인 성지를 5번이나 순례하는 기록을 세웠기에 호기심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컸다. 우리는 9박 10일의 스페인 여행 기간동안 대부분 성당 순례를 하였다. 그곳의 세계적인 대성당들은 화려하고 찬란하면서도 웅장하여 궁궐 못지않은 건축미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거대한 제단을 가득 메운 성물의 대부분이 황금으로 조립된 것이란 점이다.

금빛 찬란한 성물이 빼곡하게 들어찬 대형 벽면을 보는 순간 약소국을 침략했던 스페인의 공격이 끔찍하게 되살아났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은 스페인이 처음 그 땅을 침략했을 때 자신들을 구제해줄 신이 나타났다고 후하게 대접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다. 더구나 잉카제국의 금과 은을 발로 이겨 방 안 가득 쌓은 후 모두 착취해 갔다는 안내자의 말에 소름이 돋았었다. 왜 남의 일에 내가 발끈해지는지는 몰라도 가장 성스럽고 가장 평화스러워야 할 성당에서 약탈과 무력으로 착취해간 금을 가지고 제단을 장식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들은 자신의 행위는 생각지 못하고 뻔뻔스런 얼굴로 신도들에게 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가르쳤을 것이 아닌가.

세계는 아직도 많은 나라가 종교 분쟁으로 피를 흘리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수단, 필리핀,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코소보와 같은 나라들의 골 깊은 대립은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어렵게 보인다. 싸움은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게 마련인데 팽팽히 맞선 국가 간의 종교 대립은 타협이 불가능하므로 애꿎은 국민들만 목숨을 잃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한 나라 안에서 이교도들을 축출하느라고 이미 벌써 끔찍한 피비린내를 일으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이 남미를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은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결합으로 그라나다를 정복하고 유대인이나 회교도들을 개종, 또는 추방하면서 종교통합을 이룬 덕이다. 그런데다 국력이 막강해지면서 콜럼버스 원정비용을 조달하고 신대륙 발견에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더 확실한 건 승승장구하던 스페인의 오늘을 낳은 인물이 바로 놀라운 정치력과 광적인 신앙심을 가졌던 이사벨 여왕이다.

이사벨 여왕은 스페인 역사상 경제적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처음엔 종교법정과 함께 이교도들을 끌어안았으나 나중에는 이들을 박해하고 추방했던 정치 오점을 남겼다. 그 당시 교황의 스페인 왕국 간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컸고 군주 권력을 극대화하여 중앙집권정치를 성공적으로 일구어낼 욕심이 많았다. 그녀는 국민을 위한 집념의 불꽃을 활활 태우며 500년간 스페인 제국 시대의 왕국을 딛고 우뚝 설 수 있었는데 그 저력이 바로 정치적 통치력에서 나왔다는 점이 놀랍다. 이사벨은 그리 평탄하게 왕권을 물려받았던 여인도 아니었다.

국왕인 오라비에게 쫓겨나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데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정신병으로 죽고, 남동생 둘을 데리고 어린 가장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고난과 역경을 신앙심으로 이겨냈다. 그녀가 16세 때 다시 궁궐로 들어가게 된 것은 국권 확장에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 국왕이 이사벨을 공부시킨 덕이었으며, 정략결혼에 이용할 목적으로 늙은 포르투갈 왕에게 결혼시킬 계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리한 이사벨은 미리 이웃나라 아라곤 왕자에게 청혼한 뒤 몰래 결혼을 하고 말았다. 그 후 자신을 지지해주는 세력에 힘입어 후계자의 자리를 굳혔고, 장기간 권력 암투에 시달렸지만 왕권을 물려받으면서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남미를 지배했던 배경이나 종교의 간섭을 받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게 된 나는 그제야 스페인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특히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이사벨의 곡예 인생에 같은 여성으로서 뜨거운 성원을 보낼 수 있었으니 나도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남성 못지않은 여성의 정치력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예가 얼마나 많은가. 중국의 측천무후나 서태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스웨덴의 크리스티나여왕, 대영제국을 이끈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 그들에 다시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을 추가시키면서 나는 그녀의 지혜로운 용단과 영악한 판단에 박수를 보내게 되었다.

세상일은 단순하지 않아서 무수한 음모와 계략에 휘둘리게 되는데 자기 의지대로 중심을 잡고 카리스마를 던질 용기가 어디 정치뿐이겠는가? 지아비를 목숨보다 더 섬겼던 열녀들이나 무수한 예술가들의 열정 모두 생의 불꽃을 화끈하게 연소시킨 넋들이라고 믿는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어둠을 겪었다 해도, 극한 속에서 생명의 불꽃을 남김없이 지필 의지가 있다면 어떤 삶보다도 위대한 인생을 장식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그 불꽃 앞에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문학상(98년), 강원수필문학상 외

저서 ≪호수지기≫ 외 다수. 춘천문화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