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주는 말

 

鄭木日

 

고독하고 답답할 적에 맞아주는 벗이 있으니, 바람이다.

 

한마디 말하지 않아도 천언만감(千言萬感)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벗은 바람뿐이다. 바람을 쐰다는 것은 바람과의 동행을 말한다. 바람과 함께 걸어 산책길에 나서면 마음이 온유해 진다.

 

심신을 파고들어 속속들이 안아주는 애인이 있으니, 바람이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포근히 껴안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바람에게 전신과 영혼을 맡길 수 있으니 행복하다.

 

곁에 아무도 없어도 함께 산책길에 나서는 동반자가 있으니, 바람이다.

 

천진한 언어로 주고받으며 무작정 걸어갈 수 있으니 좋다.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지 않아도 서로 온몸을 맡기며 영혼 교감을 나누면서 걸을 수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촉감 언어를 지녔으니, 바람이다. 눈동자 속으로, 코와 귀속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신선한 기(氣)를 분사기(噴射機)로 뿌려주는 듯하다. 정신이 청명해진다. 날아갈 듯 상쾌해지고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현재 진행형이다. ‘우르르….’ ‘쏴아….’ 머리카락을 날리며 휘파람을 불고 오는 소년처럼 포효하는 태풍처럼 변화무쌍의 얼굴을 지녔다. 바람과 함께 걸으면 하늘, 구름, 자연, 영원이 보인다. 가질 수 없는 세계의 말과 얼굴이 떠오른다.

 

한마디 말 없어도 소통할 수 있는 교감 언어를 나눌 수 있으니, 바람이다. 신통(神通)이 아닐까. 나는 스쳐가는 존재에 불과하다. 존재란 일시적으로 흘러가는 운명체라는 걸 깨우쳐준다. 순간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내 육체는 땅의 품에 맡겨질 것이지만, 영혼은 바람의 품에 맡겨지리라. 자유롭게 항상 순간으로 흘러가리라. 소유하고 머물고 영원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집착에 불과하다. 심신을 비워내야 바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

 

하늘과 우주의 교신자(交信者)요 자연의 철학자가 있으니, 바람이다. 예지와 미래와 생명의 냄새가 난다. 자연 질서와 생명의 순리를 알려주는 바람의 말, 순간에서 순간으로 흐르는 바람의 말을 어떻게 듣고 해독할 수 있을까.

꽃눈과 잎눈을 틔우는 바람, 익은 밀과 보리 향기를 넘치게 하는 바람, 과실과 곡식의 열매를 익게 하는 바람. 천지를 뒤덮을 듯 돌진하는 태풍, 만물을 얼어붙게 하고 떨게 만드는 바람…. 생명을 키우고 성숙 시키고 열매 맺기 위한 전 과정을 가르쳐 준다.

 

대화자가 없어도 동행자가 없어도 언제나 함께 할 대상이 있으니, 바람이다. 내 고독의 위무자일 뿐 아니라, 침묵과 영육까지 다 알고 있는 동반자에게 은혜와 감사를 느낀다. 함께 거닐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든든한 대상이 있어 좋다.

 

바람을 닮고 싶으면 홀가분하고 가벼워져야 한다. 깃털처럼 부드러워져야 한다. 순간을 스쳐가는 삶을 배워야 한다. 순간의 자각과 진실을 얻어낼 줄 알아야 한다. 머물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떠나야 한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현대수필문학상 수상(95년).

수필집 ≪별이 되어 풀꽃이 되어≫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