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우은주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중 3이었을 때 그 당시 최고 인기 DJ였던 S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가 읽어 내려갔던 모노드라마를 통해서였다. 밤 10시가 되면 나는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시처럼 아름답고 동화처럼 환상적인 어린 왕자 이야기를 감미로운 목소리의 DJ를 통해 만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 내가 다니던 어학당의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영어판 ≪어린 왕자≫를 읽어주면서 받아쓰기를 시켰다. 듣기 연습이었는데, 처음에는 받아 적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영어판 ≪어린 왕자≫를 사서 본문을 집에서 외웠다. 사실 그것은 반칙이었다. 듣기 테스트인데 미리 외워가다니. 하지만 선생님께 칭찬받는 맛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데 나 혼자 다 맞추는 기분에 열심히 외웠다.

금빛 머리칼을 가진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하는 말. “너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멋질 거야! 금빛으로 무르익은 밀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럼 난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 거야.” 사랑하는 이의 머리카락 색깔을 닮은 밀밭에서도 그의 숨결을 느낀다니! 중학생 때 친구들이 읽어대던 하이틴 로맨스에 나올 것 같은 간지러운 말이지만, 왠지 다시 한 번 음미하게 되는, 사랑하는 이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다. 그때 ≪어린 왕자≫를 외우고 외우면서 나 혼자 설레어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린 왕자를 두 번 만나고서 난 그를 잊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어린 왕자가 망토를 걸치고 펜싱 칼을 손으로 집고 있는 모습이나, 자기 별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려진 표지가 눈에 띄었지만 난 그를 외면했다. 어떤 때에는 애써 외면했고, 어떤 때에는 정말로 별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사는 게 바빴다고나 할까?

 

며칠 전, 동사무소 옆 도서관에 들렀는데, 거기에 ≪어린 왕자≫책이 꽂혀 있었다. 그냥 스쳐 지나려다가 책을 한 번 꺼내보았다. 소행성에 어린 왕자가 혼자 서 있는 모습이 표지에 그려져 있었다. 가만히 책을 펼쳤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열여섯 살이었던 우은주는 이제 비슷한 또래의 아들을 둔 중년 여성이 되었지만, 어린 왕자는 삼십 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도 그는 작가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조르고 별에 혼자 두고 온 장미꽃을 그리워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고, 별들이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송이 꽃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꿈속에만 사로 잡혀있는 듯한 그의 대사는 내게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장미, 여우, 밀밭….

책을 조용히 덮으려는데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어린 왕자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앓으며 그를 생각하기에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책을 빌려 나와 ≪어린 왕자≫책표지를 들여다보며 걸었다.

 

“사춘기? 엄마 때는 사춘기라는 게 없었어!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사춘기는 무슨 사춘기야!” 아이에게 훈계라며 뱉었던 나의 대사가 떠올랐다. 엄마 때는 사춘기가 없었다고? 그게 정확한 말일까? 밤마다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듣고, ≪어린 왕자≫ 모노드라마를 두근거리며 기다렸던 그 시절을 사춘기가 아니었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어린 왕자를 외면하고 부정했던 것처럼 나의 사춘기를 부정해 왔던 것은 아닐까?

집앞 건널목에 다다랐다. 그 시절 DJ가 들려주었던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이 내 귓가에 울려왔다. 그리고 길 건너편에서 어린 왕자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내게 다가와 나를 처음 만난 듯이 말을 붙일 것이다.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계간수필≫(2006년)로 등단.

≪계수회≫ 회원

현재 세종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