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모든 것은 시가 된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 여행을 하던 중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마주친 구절이다. 늘 뭔가를 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구경하고 싶으면 하고 쉬고 싶으면 쉬면서 오롯이 주어진 나만의 시간에 행복하기만 하던 어느 날이었다. 전시실 사이사이 비치된 긴 의자에 앉아 북적거리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보며 지금이 내 생애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던 날이었을 거다.

‘풍경이 있는 방’이란 주제로 19세기 유럽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기획전이었다. 흰 벽면 위, 제목에 이어 큼직하게 명기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모든 것이 시가 된다. 멀리 있는 산들, 멀리 있는 사람들, 멀리 있는 사건들: 모든 것이 로맨틱해진다.”는 노발리스의 시구(1798)는 매혹적이었다.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있던 여행 중이라 더욱 그랬다.

열린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19세기 낭만파 화가들이 즐겨 다루던 주제라 과연 모든 그림들이 섬세하면서도 평화로웠다. 창이 있는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창밖을 보고 있는 여인, 창 옆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등, 다양한 형태의 창이 있는 실내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은 보는 사람을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창을 통해서만 빛이 들어오고 있으므로 창 주변과 창밖 풍경만 훤하다. 어둑하게 그늘이 드리워진 방안과 대조적으로 창 너머로는 뭉게구름이 떠있는 푸른 하늘, 푸르스름한 산등성이들, 드높은 하늘 아래 노란 잎의 나무들, 우거진 수풀 너머 돛단배들이 드문드문 떠 있는 바다 등이 펼쳐져 있다. 노발리스의 표현처럼 멀리 보이는 풍경들은 로맨틱하고 수려하기만 했다.

그런데 우연일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들이다. 그 중 모리쯔 폰 쉬빈트의 <아침시간>은 침실을 정돈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는 듯한 여성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랍장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왼쪽의 것에는 아직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 어둠침침하다. 오른쪽에 놓여있는 침대위에는 이불이 흐트러져 있고 옆의 의자 위에는 벗어놓은 옷인지 시트인지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머리는 하나로 모아올리고 종아리가 드러나는 길이의 무명 같아 보이는 소박한 원피스차림으로 보아 여인은 하녀인 듯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첩첩이 겹쳐진 산등성이들이다. 여인의 고개는 살짝 오른편을 향하고 있어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거나 청량한 아침공기를 마시는 것 같진 않다. 양 손은 창틀을 짚고 왼 발뒤꿈치가 살짝 들려 있어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무얼 보는 걸까? 산 아래 나있는 길을 바라보는 걸까? 누군가 아는 사람이 지나가는 걸까? 아니면 산 너머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일까? 창밖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그녀가 저 멀리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 거라면, 자신의 처지와 다른 삶을 동경하며 내다보고 있는 거라면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창 너머 펼쳐진 정경을 바라보던 소녀시절 내가 떠오른다.  

이층에 있던 내 방. 창문을 열면 마당의 목련이며 이웃집 지붕 너머 공터가 보였다. 창 옆에 책상을 바짝 붙여 놓고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하다가 창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봄이면 흰 꽃을 소담하게 피워낸 목련을 보며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가을을 지나 겨울, 잎이 다 떨어져 헐벗은 나무를 내려다보며 스산해하기도 하고 공상에 잠겨 있다가  뭔가 끼적거리기도 하는 소녀가 있는 풍경. 사춘기 여린 감성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감상에 젖고 별거 아닌 일에도 심각해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던, 지금 돌아보면 미소가 떠오르는 순수한 풍경화의 일부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 되면서 그 창을 떠났고 창밖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을 기회는 점차 사라져갔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는 아이가 밖에서 잘 노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첫애가 만 세 살 때 유아원에 간다고 바이바이하며 깡총거리던 모습을 창 너머 바라보며 마주 손 흔들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좀 더 자라서 유치원 다닐 무렵엔 9층 아파트 거실 창으로 놀이터가 잘 내려다 보였다. 놀이터에서 잘 노는지 수시로 내다보기도 하고 밥 먹을 때가 되면 창을 열곤 “밥 먹어라” 소리쳐 부르기도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살던 아파트에서는 거실창밖으로 아파트 담장 너머 가로로 뻗은 1차선 도로와 보행로가 건너다 보였다. 키 큰 나무들이 일렬로 죽 늘어선 길 끝에 아이의 통학버스가 섰다.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앙상해진 가지 사이로 걸어가는 아이 모습이 잘 보였지만, 잎이 무성해지는 여름날엔 아이의 작은 몸은 나뭇잎들로 가려지고 나무둥치 사이로 종아리만 언뜻언뜻 드러나곤 했다. 그렇게 나무들 사이로 지나가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가슴은 기도로 가득차고 눈엔 눈물이 고이곤 했다.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소녀는 이제 창밖의 풍경보다는 구체적인 삶을 걱정해야 하는 중년이 되었다. 아이도 어느덧 성인이 되어 취업과 결혼을 걱정할 나이가 되었다. 오랜만에 거실 창으로 이제 처녀가 된 아이를 배웅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삶의 매 순간 후회하지 않으며 살아가길 기도해본다.

 

 

≪계간수필≫로 등단(1998년)

현, 명지전문대 문예창착과 교수.

저서 ≪상상의 지도≫ ≪말글삶≫ ≪생각 글 말-내 안의 가능성을 보다≫

산문집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