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를 꺾으며

 

이정하

 

자연은 소리 없이 조용하게, 인간사 치열한 우리 곁에서 변화를 갖고 온다. 지난 번 기차 안에서 봄눈이 오는 줄 알고 얼마나 황홀했던가. 무심한 바람결에 견디지 못한 벚꽃들이, 뿌연 황사를 데리고 흩날리던 것이 진눈깨비로 착각을 가져오더니, 봄의 연두 빛 잎사귀에서 초록의 물결을 본다.

뉴스에서 금융파산과 감독관의 부조리를 연일 보도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가 어렵고 시국이 어수선하다고들 아우성이다. 그 소리들은 허공을 떠도느라 신물이 난다. 그러나 자연은 겸손하다. 차근차근 흐트러짐 없이 미덕을 지킨다.

오랜만에 산에 갔다. 언니와 동생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 다섯이 배낭을 메고 산을 올랐다. 사실 오늘 산행은 봄나물 채취를 위해 형제들이 멀리서 달려온 것이다. 산에 고사리가 많이 나는 것은 알았지만 취나물이 밤나무 밑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것을 지난 가을에 등산하던 언니가 발견했다. 그 후 우리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고사리가 많이 올라왔을 때를 가늠하여 날짜를 잡은 것이다. 산으로 오르는 과수원에는 복숭아꽃이 볼을 붉히며 해맑게 웃어주고, 배꽃은 배시시 속없는 여자의 웃음처럼 지천으로 피어나 눈이 부시다.

과수원을 지나 산의 초입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 찰밥을 하고, 나물을 무치고, 고기를 준비했던 것을 꺼냈다.

“우와, 우리 오늘 잔치 합니까?”

제부가 눈을 굴리며,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뽑는다. 차에서 내려 줄곧 혼자 앞서 걷더니 음악 속에 빠져 있었던가 보다.

가을에 짙은 갈색으로 우리를 맞아주던 오솔길에 오늘은 연푸른 잎들이 눈 맞추기에 바쁘다. 고사리를 찾아 산을 헤매는 동안 제부는 내 뒤를 따라 다니며 음악 이야기를 한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팝을 좋아하는 제부는 무슨 음악이든 한 곡을 선정하면 며칠을 그것에 몰입하여 듣는다. 거기에서 헤어날 때 쯤, 한동안 접어 두었던 다른 음악을 꺼내 듣고 또 듣는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은 순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되어 있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가 제부의 옆모습이 정말 유순해 보인다.

“저는 요즈음 버스를 타고 출근 합니다.”

승용차를 가지고 다닐 때와는 다른 행복함이 있는데 그게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사색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런 날은 환자의 등을 한 번 더 다독여 줄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고 했다.

제부는 개인의원을 하다가 얼마 전에 종합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원을 하는 동안 재정적인 문제로 적잖은 애를 먹었다. 지금은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얘기를 하는걸 보면, 내색하지 않은 속내가 오죽했으랴 싶었다.

마른 고사리대가 있으면 반드시 그 옆에 새 고사리가 돋아 있는 것이 신기하다.

가을, 홀씨를 날려 보내고 자욱한 안개 같은 웃음을 흘리며 봄을 기다리는 여정은 생기가 넘치지만은 않았다. 찔레가시 덤불이 몸을 찌르는가 싶더니, 칡넝쿨이 여린 몸을 칭칭 감고 돌아 어지럽고 신간스러웠다. 겨울은 또 얼마나 혹독한 시련이던가.

지나가던 낙엽이 이불이 되어주고, 따스한 햇살이 내려와 차가운 살결을 만져주었다. 어둠이 부드러워졌다. 온기가 느껴진다.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 있는 힘을 다해 어둠을 밀어냈다. 어림없다. 아직은 딱딱한 겨울이 가슴을 눌러댔다.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어 몸을 뒤척였다. 번민에 빠져드는 밤이 얼마였던가. 실낱같은 빛을 보았다. 터널 끝에 있는 그 새로운 세상이 조금씩 보인다. 파르스름한 안개가 끼 인 푸른 숲이.

뽀송한 솜털을 달고 기어코 펴지 않을 것처럼 꼭 지어진 채로, 제일 먼저 올라오는 것은 암갈색인데다 튼실하다. 아직 잎이 올라오지 않은 주변의 분위기와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능인가 보다.

튀지 않으며 소란스럽지 않게 나만의 의지와 꿈을 갖고 옹골차게 태어나, 몇 번이고 꺾이어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나 홀씨가 되어 날아가는 고사리.

자유를 꿈꾸며 날아가는 일은 세상사 초연히 떨치고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묵묵한 침묵을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처음 꺾어보는 고사리가 동생에겐 잘 보이지 않나 보다. 그만 내려가자고 성화다.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욕심을 부린 언니와 내 배낭에는 고사리가 가득하다. 재미로 하면 좋을 텐데 욕심을 부려 노동을 한다며, 몸살할 거라고 동생이 투덜거린다.

“이거 언니 가져.”

아스파라거스 같은, 연한 잎들이 바람 앞에 시들해져 있다. 피어버린 고사리 한 움큼 손에서 내려놓으며 날더러 가지란다. 언니와 나는 마주보며 히죽거렸다.

내 배낭에 고사리 절반을 덜어 동생에게 주었다. 고사리는 삶아서 찬물에 헹구는 게 아니라고 했다. 식혀서 햇볕에 잘 말려서 쓰라고 일러 주었다.

고사리를 삶는다. 천년을 머금은 그 특별한 향이 온 집안을 덮는다. 태고 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온 고사리. 그 강직함을 가로채 온 것 같아 미안하다.

어른거리듯 온 몸이 들쑤시는 징조가 동생이 예감했던 그것이 오려나 보다.

 

 

≪계간수필≫로 등단(2003년).

경남수필문학회. 진주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