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百花를 말려

 

김용옥

 

제비꽃, 장다리꽃, 민들레꽃, 자주괴불주머니꽃, 토끼풀꽃, 진달래꽃, 왕벚꽃, 골담초꽃, 가막살나무꽃, 쇠물푸레꽃, 이팝꽃, 조록싸리꽃, 말발도리꽃, 때죽나무꽃, 찔레꽃, 벌깨덩쿨꽃, 석창포화, 넝쿨장미화, 긴기아남꽃, 석곡화, 민귀화, 창포꽃, 감꽃, 인동꽃, 씀바귀꽃, 애기똥풀꽃, 접시꽃, 자란화, 아기나리꽃, 꿀풀꽃, 양귀비꽃, 붉은토끼풀꽃, 오공국화, 다래꽃, 초롱꽃, 노랑매말톱꽃, 약모밀꽃, 대문자초꽃, 수레국화, 엉겅퀴꽃, 석죽화, 풀협죽도화, 마삭줄꽃, 백등화, 붉은찔레꽃, 철쭉꽃, 대엽풍란화, 석류화, 견우화, 달맞이꽃, 낮달맞이꽃, 금계국화, 나리꽃, 치자꽃, 왕쥐똥나무꽃, 벌노랑이꽃, 비비추꽃, 장미화, 까치수영꽃, 산수국꽃, 해당화, 배롱나무꽃, 참깨꽃, 분꽃, 옥잠화, 맨드라미꽃, 할미밀빵꽃, 좀나팔꽃, 백목련화, 박주가리꽃, 모감주꽃, 돼지감자꽃, 패랭이꽃, 매화, 페추니아꽃, 오이꽃, 싸리꽃, 잇꽃, 닭의장풀꽃, 봉숭아꽃, 과꽃, 부처꽃, 벌개미취꽃, 소엽맥문동꽃, 쑥부쟁이꽃, 배초향, 참취꽃, 꽃무릇꽃, 새콩꽃, 소국화, 분홍바늘꽃, 기생초꽃, 수국꽃, 원추천인국꽃, 개망초꽃, 박하꽃, 상사화, 맨드라미꽃, 이팝나무꽃, 백련화.

 

온종일 시름없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독서만한 게 있을까. 음악을 듣거나 화집을 넘기는 일도 요가를 하는 일도 온종일 계속하진 못한다. 을씨년스런 날, 이 책 저 책을 읽다가 난화주 한 모금으로 몸을 덥히다가 문득 백화주百花酒란 단어가 떠올랐다. 백화주百花酒. 나이 좀 들면 마지막으로 담아 보리라 미루었던 꽃술. 늦기 전에 백화주를 담아 보아야지.

생활에 쫓겨 동분서주하며 살다간 인생 다 놓친다 했던가. 몇 년간 나는 오직 생활인이었다. 삶의 멋이라곤 없는 맹숭맹숭한 시간들이 주는 건 신물 나는 속물성의 곤때밖에 없다. 그러다가 병에 말려들었다.

나에게 병고는 휴식이며 인생에 대한 경고다. 아프면서 나는 느릿하고 한가해져서, 오래 책을 읽고 오래 식물을 바라보며 오래 생각에 잠기곤 했다. 간간이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 년 동안에 틈틈이 꽃을 따 말리기 시작했다. 소양 송광사 연지에서 얻어온 백련화를 100번째 마지막 꽃으로 말렸다.

내 눈에는 늘 꽃이 보였으므로 백 가지 꽃을 따 모으기는 쉬울 것 같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꽃핌이 철에 따라 다르고 장소에 따라 다르고 눈에 띄기도 다르다. 갓 피어난 새 꽃은 안쓰러워 못 따고 어느 땐 너무 늙어서 못 땄다. 또 꽃의 크기와 향기에 따라 최소한의 양만 취한다. 먹어도 되는 꽃들만 땄다.

꽃잎 얇실한 꽃송이들을 작은 싸리채반에 화선지를 깔고 널어두면 그 색깔들의 어우름이 작은 만다라요 꽃내음은 내 마음을 물들였다. 눈물과 미소가 스쳐가고 사랑의 매운 내가 솔솔 흐르기도 한다. 슬프고 아프지 않은 꽃의 탄생설화가 어디 있으랴. 곳곳에 내게로 와 줄 꽃들이 피어 있지만 마음이 내키어야 몇 꽃송이 손바닥에 따 담는다. 마음속에서 잊고 있던 추억 하나씩 꺼내 읽듯이 꽃들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연꽃이 질 때 시작하여 연꽃이 새로 필 때까지 일 년 간 건화는 차곡차곡 냉동보관 되었다. 길고 긴 인내심과 생각과 행동이 백화로 모아지자 유리단지에 꽃잎을 흩어 넣고 벌꿀 한 술과 소주를 부었다. 시간은 저 홀로 가고 꽃술단지는 어둑한 곳에서 서늘하게 잠을 잤다. 백화가 서서히 우려내는 술 빛깔은 짙은 다갈색, 주향酒香은 오묘하다. 술의 적갈색은 보라 분홍 빨강 하양 노랑 등등 요지가지 색깔의 총화이고 달콤 비릿하고 새콤쌉싸롬한 갖가지 향내가 모여 살내음 같은 절묘한 향기를 길어냈다. 사랑의 심향이 이렇게 묘한 것일까. 꽃핌의 고난이 이렇게 심오할까. 사람의 향훈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듯이 백화주 향기에 목이 싸하다. 백화주는 평범하고 깊은 기름진 흙 같은 화색和色이다. 천태만상의 사람이 어우러지면 저러한 색깔이 되고 향기가 될까.

새댁 때,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사 모은 갖가지 양주와 양담배를 실내장식으로 늘어놓고 보며 가외의 살림재미로 과실주를 빚었다. 내가 빚은 놀묨하고 향기로운 모과주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이라고 아버진 칭찬하셨다. 어머니가 내방하는 시인묵객들과 어른들의 생신이나 잔치에 가양주를 빚어 대접하는 것을 보고 자란 덕분이다. 여자가 술을 담글 때는 정과 멋과 풍류로 담근다. 음식을 맛깔스레 장만하고 가용주家用酒를 담그는 것은 삶을 여유롭고 향기롭게 하는 일이다.

젊을 때 내내 요지가지 술을 담갔다. 째를 좀 낸 거다. 죽엽주, 국화주, 매화주, 백련주, 연경주, 산삼주에 내 집에서 꽃 피운 여러 난화주들. 걸러진 술들은 100개의 작은 술병에 담겨 어둡고 서늘한 곳에서 이삼십 년간 깊은 잠을 자고 있다. 그것을 나눠 마시려는 어떤 잔칫날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자연 속에서 백팔번뇌를 처리하고 108관음을 깨달으며 얻은 꽃들의 어울림 백화주. 백 가지 꽃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주면서 그 색과 향과 전설을 생각한다. 술을 담그면서 어머니의 맛과 아버지의 멋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백 명의 제각각 아름다운 사람을 가졌는가? 나는 그 사람의 빛깔과 인격과 삶을 꽃처럼 예쁘게 여겼는가? 그들이 내 인생의 향기요 의미가 되었는가? 나는 한 번이라도 그들이 불러주고 싶은 이름이 되었는가?

백화주는 지금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저 꽃송이들이 자신의 색을 온전히 헌신하여 한 가지 색으로 아우러지고 제각각의 향기를 버리고 둥근 향기로 깊어지기를. 그렇게 시간이 저절로 가고 술이 익으면 아흐레 달밤이나 열사흘 달밤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인생을 아는 사람’을 불러 월광 아래 마주 앉아 백화주에 월색을 띄워 권하리라. 술꾼이 아니라 시문詩文을 아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주정의 언설이 아니라 도를 아는 사람이면 더더욱 좋겠다. 절묘하고 단순한 꽃술 같은 사람 하나 마주하면 참 좋겠다.

 

 

≪전북문학≫ ≪시문학≫으로 등단.

전북문학상,백양촌문학상,신곡문학상 외 다수 수상.

수필집 ≪生놀이≫ 외 3권, 수필선집 ≪찔레꽃 꽃그늘 속으로≫